The Principle of Charity as the Conditions of Thought
경북대학교 문학석사학위논문
간추림
‘What are the conditions necessary for the existence of thought, and so in particular for the existence of people with thoughts?’ Thought is a mental event. Since though the mental and the physical share ontologies, according to Donald Davidson, they do not share classificatory concepts, there exists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o describe an event as the mental and to describe as the physical. That is, there is a permanent conceptual divide between the psychology of the mental and the physics of the physical. To describe an event as the mental, in particular, as intentional action, it is necessary to connect causally the event with a reason of an agent. This name reason explanation. The reason explanation is a kind of causal explanation. The causal aspect or the dispositional aspect of the mental cannot be eliminated by physical law.
Utterance is an action, a verbal action. The interpretation of speaker’s utterance is redescription of speaker’s verbal action as intentional action. To redescribe speaker’s utterance as intentional action, interpreter must relate speaker’s utterance with speaker’s reason causally. It means that the meaning of uttered sentence depends on intention, desire and belief of speaker. Hence interpreter have to know speaker’s belief in order to know the meaning of sentence uttered by speaker. But the belief of speaker cannot be known without knowing the meaning of the sentence. For belief is a propositional attitude, so the content of belief is a proposition. Now interpreter should bear the burden of grasping the meaning and the belief of speaker simultaneously. The interpretation that interpreter have to grasp the meaning and the belief without assuming both is called as radical interpretation.
By empirical examination of radical interpretation, Donald Davidson show that what the right sort of interpretation are. The rule for the right sort of interpretation is the Principle of Charity. The Principle of Charity is a direction that do interpret a speaker by assigning truth conditions to the uttered sentences that make or find her ‘consistent, a believer of truths, and a lover of the good’. The Principle of Charity is the minimum strategy for interpreter wanting to interpret the mind of interpretee rightly. Davidson says that charity is not an option, but a condition of having a workable theory. We, in this paper, try to explicate the implications of the Principle of Charity. These are presupposition of common world and the community of mind.
The mental is not under control of physical law but obeys the normative principle. Here the normative principle is the very Principle of Charity. The claim that in description or explanation of the mental, the Principle of Charity is needed can be extended the claim that the conditions necessary for the existence of the mental are the implications of the Principle of Charity as such. Thus our conclusion is that the conditions of the presence of the mental, or thoughts are the objective common world and the interpersonal community.
천송이는 이 논문을 표절했습니다.
나오는 말
사람은 땅 위에 살고 있다. 즉 사람의 삶은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 땅은 물리적인 세계이고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곳이다. 만일 존재한다는 것이 물리적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사람의 존재는 곧 땅에 종속된 존재이다. 땅에 사는 우리는 땅의 제약을 받는다. 땅의 존재로서 사람은 땅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땅에 존재하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존재한다. 사람은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 뼈는 부러질 수 있고 살은 찢어질 수 있다. 부서질 수 있고 손상될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을 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은 최소한의 먹을 것을 필요로 하고, 이것들은 땅으로부터 나온다. 먹어야 사는 사람은 땅 없이 살 수 없다. 땅이 먹을 것을 내지 않을 때, 사람은 고통당한다. 땅은 먹을 수 없는 독초를 내기도 하고, 가라지와 엉겅퀴를 낸다. 땅은 사람에게 언제나 친절하지 않다. 땅의 여건이 나빠지면 사람은 고통을 당한다. 땅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땅의 세력에 억압된 채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땅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
놀랍게도 현대의 학문은 사람이 바로 이런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물질뿐이라면, 그래서 사람 또한 하나의 물질일 뿐이라면, 사람들의 생각은 땅의 산물에 불과하다. 땅밖에 없는 곳에서 땅의 산물은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 속에는 아무런 진리도, 아무런 실재도 담겨 있지 않다.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사람은 이성이 아니라 다만 감정의 지배를 받는 동물일 뿐이다. 아니 심지어 사람은 감정이 없고 비정하기까지 하다.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존재이고, 땅은 알 것 없는 물체이다. 사람이 땅에 종속된 존재일 뿐 그 이상이 아니라면, 땅의 세력들이 예컨대 사람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 때, 사람이 의지할 곳은 아무 곳도 없다. 그에게는 다만 울부짓고 자비를 구걸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수 있으랴?
사회의 계약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계약은 땅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계약은 이유 없이 한 개인에게 적대적일 수 있다. 위대하고 지성적인 독일 사회는 히틀러 한 사람을 막지 못했고, 그가 수 백만 명을 죽일 때 침묵했으며, 수 천만 명이 죽어 가는 전쟁에 모두 휘말리고 말았다. 이것은 미개한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명의 시대, 심지어 신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시대의 이야기이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무수한 사람이 학살되는 일은 바로 지금 동티무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계약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실로 엄청나다. 군사력과 경찰력 그리고 정보의 수집을 위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된다. 이러한 거대한 힘은 한 개인을 이유 없이 파문시킬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땅의 강자들이 약자를 공격할 때, 그를 변호해 줄 자는 아무도 없다. 아우렐리우스가 노예들의 인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 세울 때, 교권이 종교개혁가들을 화형시키고 재세례파들을 참수할 때, KKK가 흑인들을 암살할 때, 일제가 사람들을 마루타로 만들 때, 스탈린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할 때, 크메르루즈가 양민을 학살할 때, 군사정권이 밀실에서 사람들을 고문할 때, 사회의 계약이 약자를 변호해 주었는가? 물질밖에 없는 이 땅은 너무나 무서운 곳이다.
인간의 언어 역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언어는 땅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우연적이다. 언어는 폭력 앞에서 비존재 앞에서 부자유 앞에서 소음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의 표현대로, 권력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도심 불량주거지역 흑인들의 언어게임과 국제은행업자들의 음모에 찬 언어게임은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하나는 소음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원천이다. 우리가 포스트모던 사상 속에서 모종의 진보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사상은 십대, 여성, 소수민족, 실업자 등의 목소리를 난해한 타자성 속에, 언어게임의 특수성 속에 밀폐시킴으로써, 권력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린다. 다시 말해, 객관적 진리가 없다면, 약자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와 동등하게 울려 퍼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사람의 생각이 허구이고 참된 앎이 불가능하다면, 사람은 영원히 땅에 종속된 존재가 된다. 사람은 문화나 제도나 관습 그리고 법령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타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사람들의 모든 정치․경제․학술행위는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뭇 생물들을 착취하는 무기가 아닌가! 사람은 자신이 진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바이러스나 다름없다. 사람은 단지 소비하는 흰개미이고, 생물학적 시한폭탄이며, 암 바이러스이다. 카프카나 베케트 등의 문학가들은 탁월하고 멋들어지게 동료 인간들을 동물로 묘사하였다. 사람은 좋은 것을 사랑하고 옳고 참된 것을 보유하고 있는 지성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단지 외부세계에 의해 규정된 동물일 뿐이다. 난폭한 외부세계가 인간의 본성을 결정한다. 미셀 푸코는 비인격적 체계 또는 구조가 인간의 본성을 좌우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즉 주체에 앞서 체계가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인간의 죽음을 외쳤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물질밖에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해프닝으로 가득할 것이고 사막 같은 곳이 된다. 우리는 절망 자체에서, 비극 자체에서, 무 자체에서, 우연성 자체에서 의미를 창출할 수 없다. 오직 사막뿐이라면, 과연 니체는 땅에 충실할 수 있겠는가? 세계 속에는 물리적 충돌과 요동뿐인데, 어떻게 키에르케고르처럼 신앙의 비약을 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우연인데, 어떻게 야스퍼스처럼 어떤 최후의 경험 소위 실존적 경험을 기다릴 수 있는가? 절망뿐이라면, 어떻게 사르트르처럼 무엇 무엇을 하려는 행위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가? 정말 모래뿐이라면, 하이데거처럼 존재하는 어떤 언어 또는 시를 지시하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비록 내가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실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만일 실재가 없다면 무슨 변화를 바랄 수 있는가? 우리는 앨더스 헉슬리처럼 마약을, 아니면 티머시 레어리처럼 LSD를 제일차적 경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로 인정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세계 속에 진리가 없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개인의 삶 속에 공적인 의미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절규했다. 다다 그룹에 속해 있었던 마르셀 뒤샹은 사람들이 자기의 그림을 볼 때 어떤 불결함을 느끼도록 자극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선동했다. 뒤샹은 「해프닝스」라는 이름의 전람회에서 거대한 그러나 텅 빈 액자를 설치한다. 이때 관객들은 우연히 그 액자의 인물이 된다. 이쪽 사람은 저쪽 사람을, 저쪽 사람은 이쪽 사람을 액자의 주인공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액자에 담긴 내용의 주제는 우연 그 자체이다. 암스테르담의 프로보스 투사들은 자신의 무정부주의 시위를 ‘해프닝스’라고 불렀다. 피에르 쉐페르에 의해 전개된 뮈지크 콩크레떼의 연주들에서 인간의 언어는 우연히 발생되는 뒤틀린 소리로 재현된다. 그 소리에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순하디 순한 여성이 그 자리에서 죽어 썩어 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그의 영화 「침묵」에서 사람들의 인생을 재현하기 위해 외설적 장면들을 단편적으로 짜 집어 놓는다. 존 오스본은 「마르틴 루터」라는 연극에서 역사의 우연성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준다. 그 연극은 자네는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한 수도원장의 물음에 대해 그렇게 되기를 바랍시다, 라는 루터의 대답으로 끝난다. 헨리 밀러는 지금 이곳의 개별적인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범우주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새롭게 부상할 것이기 때문에, 개인상호간의 진리, 개인적인 의미는 무의미하며 그래서 개인적인 섹스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말 것을 제언한다.
객관적 진리가 없다면, 문화를 근거지울 만한 공통의 기반 또한 있을 수 없고, 공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연적인 사교를 통해 연대성이 창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문화와 가치>에서 자신이 유럽 문화에 대해 아무런 연대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이 적극적으로 헌신할 만한 공적 삶이 없음을 한탄했다. 만일 사람들 사이에 공통의 담론이 없다면, 자신의 사적인 삶을 공적인 삶과 연관시킬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티는 <우연성․아이러니․연대성>에서 우연성에 의해 연대성이 창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 진리 없이 사람들 사이의 연합이나 협력이 가능하며, 인간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연성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유를 준다. 그의 유토피아는 객관적 진리 없이 사교할 수 있는 사교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창조의 영역과 연대성의 영역을 모종의 기초를 통해 연결시키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시도는 공통된 인간의 본성을 요구하는데, 그러한 본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집요하게 주장했다. 바로 이 사실을 잘 아는, 다시 말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근거지우려는 모든 시도가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를 희망하기 때문에 아이러니스트가 된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자아․언어․공동체가 모두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행운이 따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로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고생이 감소될 것이라는 희망, 다른 인간들에 의한 인간의 치욕이 멈추게 되리라는 희망이 근거지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말로 희망하는 자는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리라는 희망 또한 가진다. 만일 그가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리라는 가망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그것을 더 이상 희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것을 위해, 그 희망을 근거지우려는 소망을 가진다. 우리는 인간이 물질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을 근거짓기 위해,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러한 희망을 가진다는 엄연한 사실로부터 우리의 연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논문에서 채택했던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욕구․의도․믿음 등의 본성을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희망이 성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종의 객관적 진리 위에 근거지우려 했다. 따라서 우리의 방법은 우리의 목표와 분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심적인 것의 진정성을 연구하려는 우리의 의도 자체가, 그 진정성의 관건이 된다. 우리의 의도는 심적인 것의 이유가 되고, 이유는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문 제2장에서 데이빗슨의 의미론을 통해 사람의 믿음이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2.4절의 원초적 해석론에서 사람의 믿음이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생각했다. 이때 믿음-의미-진리, 이 삼자를 연결시키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심적인 것의 전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인데, 이 전체성은 마음 공동체에까지 적용된다. 사랑은 심적인 것의 영역을 물리적 법칙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힘의 표현이다. 사랑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제3장에서 이미 충분히 살펴 보았지만,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내용은 사랑의 원리를 준수하는 올바른 해석 상황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랑의 원리란, 삶의 전영역에서 타자의 진실됨을 인정하면서, 타자의 발화를 해석하라는 지침이다. 데이빗슨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예컨대 타자를 해석할 때, 그를, 참된 것을 믿고 좋은 것을 사랑하는 자로서, 최소한 참된 것을 믿으려 하고 좋은 것을 사랑하려는 자로서 인정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를 해킹처럼 일종의 언어 제국주의로, 또는 루트처럼 날카로운 주지주의로, 아니면 퍼트남처럼 물러터진 온정주의 또는 평등주의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의 원리는 특정한 신념의 일치 또는 과학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단지 타인의 마음에 다가서려는 최소한의 자세이다. 데이빗슨의 사랑의 원리는 해석 전에 해석자와 피해석자 사이의 공통된 본성을 미리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석자의 태도를 시뮬레이션하는 그랜디의 인간성의 원리와 다르다. 그리고 구체적인 지침이 명기된 루이스의 개선된 사랑의 원리와 달리, 데이빗슨의 사랑의 원리는 명확한 세부지침을 포함하지 않는다.
해석에 사랑의 원리를 적용시킬 때만, 믿음의 내용은 명제적 내용을 지니게 되고,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명제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 세계이다. 만일 외부 세계가 없다면, 사람의 믿음은 의미를 지닐 수 없고, 심지어 믿음을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세계가 없다면 해석자는 타자를 해석할 수 없다. 그리고 타인이 없으면 자기 믿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타인에 의해 한 번도 해석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기-해석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해석을 할 수 없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해석은 언제나 세계와 타자를 전제한다. 이것은 사랑의 원리 속에 표현되어 있는 핵심적인 전제이다. 사랑의 원리의 함축은 해석을 위해 공동체와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에 의해 타인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과 같은 공동체와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에서 폐기될 수 없는 부분은 공동체와 세계의 공유이고, 나머지 세부적 정책은 해석 과정 속에서 언제나 수정되고 개정될 수 있다. 맬파스는 데이빗슨의 사랑의 원리를 폐기될 수 있는 방법론적 측면과, 폐기될 수 없는 기본전제적 측면으로 나누기도 했다.
타자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타자를 해석하는 것, 즉 원초적 해석이 성공하였다고 생각해 보자. 해석이 성공하였다는 것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해석자와 피해석자가 서로의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없는데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대화참여자들이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해석자와 피해석자는 해석 상황에서 공적인 언어를 창출한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해석을 통해 발생된다. <진리와 방법>에 나오는 가다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의 발견은 ‘이해의 목적을 위한 도구의 준비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의 바로 그 행위와 동일하다’. 사랑의 원리 아래서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없다면, 언어가 머물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언어란 말하는 이들이 대화 속에서 안출한 공적인 개념들이다. 만일 언어가 ‘학습되어야 하거나, 숙달되어야 하거나, 또는 지니고 태어나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이런 언어는 의사소통에 본질적이지 않다. 대신 의사소통에서 본질적인 것은 해석 상황에서 안출된 마음의 언어이다. 사람들의 마음들이 공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면, 이 마음들은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사랑의 원리를 따라 의사소통하는 해석자와 해석되는이는 마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마음의 공동체가 설립될 때, 사랑의 원리는 그 이념을 달성한 셈이다. 마음의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의 각 마음은 합리적 융화를 이루고, 이들의 마음은 한마음이 된다.
데이빗슨의 해석론은, 해석자가 화자의 발화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의사소통의 본성을 밝히려는 의도로 고안되었다.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 화자는 해석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해석자는 화자를 해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해석자와 화자 사이의 의사소통은 양자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질 것이다. 의미와 믿음 사이의 불리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믿음의 본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지는 것은 심적인 사건인데, 화자와 해석자가 심적인 사건을 공유하고, 이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은, 심적인 사건이 물리적 사건과 구별되는 별도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이제 데이빗슨이 처음에 의도했던 해석의 방법론에 관한 문제는, 심적인 사건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의 물음으로 되물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심적인 사건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은 사유의 조건이기도 하고, 인식의 조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해석의 방법론이 사랑의 원리를 해석에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라면, 사랑의 원리는 곧 심적인 사건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면서 사유의 조건이다. 사유의 조건은 하나의 피조물이, 사랑의 원리 아래에서,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다른 피조물에 의해 해석되고 그를 해석할 수 있을 때, 충족된다.
사랑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공유와 공동체의 공유이다. 사랑이 사유를 생성시키기 위해 왜 이런 전제가 필요한지 개략해 보자. 사람이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를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타의 수많은 믿음들이다. 예컨대 ‘나는 생각한다’를 믿기 위해, 그는 이미 ‘나’에 대한 믿음들, ‘생각한다’에 대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수 많은 믿음들을 가지기 위해, 그는 응당 하나의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최소한 하나의 믿음을 가지기 위해, 그는 믿음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믿음은 틀릴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어떤 피조물이 믿음에 대한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틀릴 때와 옳은 때에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믿음을 가지기 위해 사람은 참과 거짓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때 타자와 객관적 세계가 없다면, 사람이 이 기준을 가지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객관적 세계를 공유하는 두 피조물이 해석을 통하여 공적인 언어를 창출할 때, 그들은 진리의 기준으로서 마음의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고, 이때 비로소 참과 거짓에 대한 기준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피조물이 사유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공동체와 세계가 필요하다. 만일 해석자가 보는 세계가 피해석자가 보는 세계와 다르다면, 해석자는 피해석자를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한마음은 불가능하고, 결국 사람은 해석가능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랑의 원리는 사람들이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선언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만일 이 원리가 거짓이라면,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랑의 원리를 해석의 올바른 지침으로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마음 공동체와 공통 세계를 얻는다. 이 양자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세계와 세계에 대한 사유 방식을 공유하고, 이런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피조물들만이 마음의 공동체를 설립할 수 있다. 이 공동체 속에 참여할 때, 하나의 피조물은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믿음 개념을 가지게 되며, 하나의 믿음을 그리고 나아가 수많은 믿음들을 가지게 되고, 최종적으로 명제적 태도를 지닐 수 있다. 명제적 태도를 지닐 수 있는 피조물만이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앎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그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믿을 수 있다. 하나의 피조물은 마음의 공동체 속에서만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다. 자기 반성이 가능한 피조물을 우리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물론 반대로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앎이 없다면 또는 자기반성이 없다면 여타의 다른 앎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자기의 마음에 대한 지식과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이 세 유형의 지식은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다른 두 유형을 하나의 유형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어떤 유형의 지식을 의심하면서 다른 유형의 지식은 의심하지 않는 회의주의도 있었다. 데이빗슨은 이러한 두 시도가 모두 앎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은 이 세 유형의 지식이 동시에 성립될 수 있을 때만 유의미하다. 그래서 사람의 인식에 있어서 세 가지 종류의 지식은 필수불가결하고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사랑의 원리에 의해 비로소 성립되는 사람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기의식 없이, 타자 없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세계 없이, 자기의식 없이, 타인과 의사소통할 수 없다. 세계 없이, 타자 없이, 자기반성은 불가능하다.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적 현상학>에서 훗설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의식과 타자에 대한 의식은 분리될 수 없고, 타자에 대한 의식은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의식 속에 함축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타자가 없다면, 우리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어떤 피조물이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하는 사람이기 위해, 그는 먼저 人-間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아름다운 말은 이렇게 재기술될 수 있다: coexisto ergo sum. 만일 타인을 생각하며 사는 것 또는 타인과 더불어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바로 사랑이 존재를 낳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사랑 없이 실존할 수 없다. 나와 내가 같은 세계 속에서 말을 나눌 때, 나는 생각할 수 있고,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되기 위해 몸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몸을 가질 때 세계 속에 거주할 수 있고, 세계 속에 거주할 수 있을 때 타인과 세계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론은 마음과 세계의 연결의 문제이고 몸이 없으면 세계와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몸 없이 의미론을 가질 수 없다. 의미론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몸의 형체화가 우연적 측면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메를로-퐁티에 의해 강조된 바이다.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몸이 인간 영혼의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로티는 객관적 진리를 포기함으로써 객관적 진리에 의해 억압받지 않는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희망했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객관적 진리를 버릴 것이 아니라, 객관적 진리와 함께 사유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객관적 진리와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마음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마음들의 공동체에 가담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타인의 마음과 합리적 융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마음의 사랑이다. 만일 당신이 사랑으로 타인과 대화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객관적 진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랑 없이, 예컨대 진실된 마음 없이 그리고 객관적 세계를 배제한 환상 속에서, 약정적 언어를 주고 받는다면, 우리는 결국 체면에 걸리고 말 것이다. 만일 어떤 공동체가 세계의 진상을 의도적으로 막고, 진실된 마음을 봉쇄한 채, 대화나 관심 대신에 서로를 감시한다면, 그 공동체는 한스-요아킴 마즈의 표현처럼 ‘사이코의 섬’이 될 것이다. 반대로, 정신병을 치료하려면, 우리는 사랑의 원리에 따라 아름다운 자연세계 속에서 타인과 대화하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한 공동체가 병들지 않기 위해, 최소한 한 명이라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만일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심적 사건이 출현할 수 없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아는 존재가 된다. 사랑 때문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른 말할 수 있다. 감각기관이 고장나도 사람은 여전히 해석가능하다. 사람은 본성상 해석가능하고 사람의 믿음은 참말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본성상 해석가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타인에게 해석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고 해석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정말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곳 땅 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대로 우리는 아직-아닌-존재들 또는 아직-아닌-의식들이다. 따라서 때가 늦기 전에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동료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타인들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녕 모를 것이고 우리 또한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나는 사랑하며 사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 사막같은 땅에서도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없다고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세계 속에 오직 물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의 소리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믿음을 가지든, 그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든 우리는 때가 늦기 전에 서로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가 이런 대화를 진심으로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리가 무엇이뇨?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선이 무엇이뇨? 우리가 사랑으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미가 무엇이뇨? 이렇게 마주보는 얼굴입니다.
사유의 조건으로서 사랑의 원리
D. Davidson의 심리철학과 해석론을 중심으로
The Principle of Charity as the Conditions of Thought
경북대학교 문학석사학위논문
간추림
‘What are the conditions necessary for the existence of thought, and so in particular for the existence of people with thoughts?’ Thought is a mental event. Since though the mental and the physical share ontologies, according to Donald Davidson, they do not share classificatory concepts, there exists fundamental difference between to describe an event as the mental and to describe as the physical. That is, there is a permanent conceptual divide between the psychology of the mental and the physics of the physical. To describe an event as the mental, in particular, as intentional action, it is necessary to connect causally the event with a reason of an agent. This name reason explanation. The reason explanation is a kind of causal explanation. The causal aspect or the dispositional aspect of the mental cannot be eliminated by physical law.
Utterance is an action, a verbal action. The interpretation of speaker’s utterance is redescription of speaker’s verbal action as intentional action. To redescribe speaker’s utterance as intentional action, interpreter must relate speaker’s utterance with speaker’s reason causally. It means that the meaning of uttered sentence depends on intention, desire and belief of speaker. Hence interpreter have to know speaker’s belief in order to know the meaning of sentence uttered by speaker. But the belief of speaker cannot be known without knowing the meaning of the sentence. For belief is a propositional attitude, so the content of belief is a proposition. Now interpreter should bear the burden of grasping the meaning and the belief of speaker simultaneously. The interpretation that interpreter have to grasp the meaning and the belief without assuming both is called as radical interpretation.
By empirical examination of radical interpretation, Donald Davidson show that what the right sort of interpretation are. The rule for the right sort of interpretation is the Principle of Charity. The Principle of Charity is a direction that do interpret a speaker by assigning truth conditions to the uttered sentences that make or find her ‘consistent, a believer of truths, and a lover of the good’. The Principle of Charity is the minimum strategy for interpreter wanting to interpret the mind of interpretee rightly. Davidson says that charity is not an option, but a condition of having a workable theory. We, in this paper, try to explicate the implications of the Principle of Charity. These are presupposition of common world and the community of mind.
The mental is not under control of physical law but obeys the normative principle. Here the normative principle is the very Principle of Charity. The claim that in description or explanation of the mental, the Principle of Charity is needed can be extended the claim that the conditions necessary for the existence of the mental are the implications of the Principle of Charity as such. Thus our conclusion is that the conditions of the presence of the mental, or thoughts are the objective common world and the interpersonal community.
천송이는 이 논문을 표절했습니다.
나오는 말
사람은 땅 위에 살고 있다. 즉 사람의 삶은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 땅은 물리적인 세계이고 그래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곳이다. 만일 존재한다는 것이 물리적 공간에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사람의 존재는 곧 땅에 종속된 존재이다. 땅에 사는 우리는 땅의 제약을 받는다. 땅의 존재로서 사람은 땅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해, 땅에 존재하는 사람은 육체적으로 존재한다. 사람은 뼈와 살로 이루어져 있다. 뼈는 부러질 수 있고 살은 찢어질 수 있다. 부서질 수 있고 손상될 수 있는 사람은 고통을 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람은 최소한의 먹을 것을 필요로 하고, 이것들은 땅으로부터 나온다. 먹어야 사는 사람은 땅 없이 살 수 없다. 땅이 먹을 것을 내지 않을 때, 사람은 고통당한다. 땅은 먹을 수 없는 독초를 내기도 하고, 가라지와 엉겅퀴를 낸다. 땅은 사람에게 언제나 친절하지 않다. 땅의 여건이 나빠지면 사람은 고통을 당한다. 땅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땅의 세력에 억압된 채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땅을 가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땅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다.
놀랍게도 현대의 학문은 사람이 바로 이런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물질뿐이라면, 그래서 사람 또한 하나의 물질일 뿐이라면, 사람들의 생각은 땅의 산물에 불과하다. 땅밖에 없는 곳에서 땅의 산물은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생각 속에는 아무런 진리도, 아무런 실재도 담겨 있지 않다.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사람은 이성이 아니라 다만 감정의 지배를 받는 동물일 뿐이다. 아니 심지어 사람은 감정이 없고 비정하기까지 하다. 사람은 알지도 못하는 존재이고, 땅은 알 것 없는 물체이다. 사람이 땅에 종속된 존재일 뿐 그 이상이 아니라면, 땅의 세력들이 예컨대 사람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 때, 사람이 의지할 곳은 아무 곳도 없다. 그에게는 다만 울부짓고 자비를 구걸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수 있으랴?
사회의 계약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계약은 땅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계약은 이유 없이 한 개인에게 적대적일 수 있다. 위대하고 지성적인 독일 사회는 히틀러 한 사람을 막지 못했고, 그가 수 백만 명을 죽일 때 침묵했으며, 수 천만 명이 죽어 가는 전쟁에 모두 휘말리고 말았다. 이것은 미개한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명의 시대, 심지어 신으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시대의 이야기이다.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무수한 사람이 학살되는 일은 바로 지금 동티무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계약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은 실로 엄청나다. 군사력과 경찰력 그리고 정보의 수집을 위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자본과 인력이 투입된다. 이러한 거대한 힘은 한 개인을 이유 없이 파문시킬 충분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땅의 강자들이 약자를 공격할 때, 그를 변호해 줄 자는 아무도 없다. 아우렐리우스가 노예들의 인권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의 반역자로 몰아 세울 때, 교권이 종교개혁가들을 화형시키고 재세례파들을 참수할 때, KKK가 흑인들을 암살할 때, 일제가 사람들을 마루타로 만들 때, 스탈린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할 때, 크메르루즈가 양민을 학살할 때, 군사정권이 밀실에서 사람들을 고문할 때, 사회의 계약이 약자를 변호해 주었는가? 물질밖에 없는 이 땅은 너무나 무서운 곳이다.
인간의 언어 역시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언어는 땅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우연적이다. 언어는 폭력 앞에서 비존재 앞에서 부자유 앞에서 소음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의 표현대로, 권력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도심 불량주거지역 흑인들의 언어게임과 국제은행업자들의 음모에 찬 언어게임은 동등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하나는 소음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의 원천이다. 우리가 포스트모던 사상 속에서 모종의 진보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사상은 십대, 여성, 소수민족, 실업자 등의 목소리를 난해한 타자성 속에, 언어게임의 특수성 속에 밀폐시킴으로써, 권력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린다. 다시 말해, 객관적 진리가 없다면, 약자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와 동등하게 울려 퍼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사람의 생각이 허구이고 참된 앎이 불가능하다면, 사람은 영원히 땅에 종속된 존재가 된다. 사람은 문화나 제도나 관습 그리고 법령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는 타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무기로 사용될 수 있다. 사람들의 모든 정치․경제․학술행위는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뭇 생물들을 착취하는 무기가 아닌가! 사람은 자신이 진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바이러스나 다름없다. 사람은 단지 소비하는 흰개미이고, 생물학적 시한폭탄이며, 암 바이러스이다. 카프카나 베케트 등의 문학가들은 탁월하고 멋들어지게 동료 인간들을 동물로 묘사하였다. 사람은 좋은 것을 사랑하고 옳고 참된 것을 보유하고 있는 지성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단지 외부세계에 의해 규정된 동물일 뿐이다. 난폭한 외부세계가 인간의 본성을 결정한다. 미셀 푸코는 비인격적 체계 또는 구조가 인간의 본성을 좌우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즉 주체에 앞서 체계가 선행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인간의 죽음을 외쳤다.
만일 존재하는 것이 물질밖에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해프닝으로 가득할 것이고 사막 같은 곳이 된다. 우리는 절망 자체에서, 비극 자체에서, 무 자체에서, 우연성 자체에서 의미를 창출할 수 없다. 오직 사막뿐이라면, 과연 니체는 땅에 충실할 수 있겠는가? 세계 속에는 물리적 충돌과 요동뿐인데, 어떻게 키에르케고르처럼 신앙의 비약을 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우연인데, 어떻게 야스퍼스처럼 어떤 최후의 경험 소위 실존적 경험을 기다릴 수 있는가? 절망뿐이라면, 어떻게 사르트르처럼 무엇 무엇을 하려는 행위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가? 정말 모래뿐이라면, 하이데거처럼 존재하는 어떤 언어 또는 시를 지시하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비록 내가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실존할 수 있다 하더라도, 만일 실재가 없다면 무슨 변화를 바랄 수 있는가? 우리는 앨더스 헉슬리처럼 마약을, 아니면 티머시 레어리처럼 LSD를 제일차적 경험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로 인정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세계 속에 진리가 없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개인의 삶 속에 공적인 의미가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해프닝에 불과하다고 절규했다. 다다 그룹에 속해 있었던 마르셀 뒤샹은 사람들이 자기의 그림을 볼 때 어떤 불결함을 느끼도록 자극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선동했다. 뒤샹은 「해프닝스」라는 이름의 전람회에서 거대한 그러나 텅 빈 액자를 설치한다. 이때 관객들은 우연히 그 액자의 인물이 된다. 이쪽 사람은 저쪽 사람을, 저쪽 사람은 이쪽 사람을 액자의 주인공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 액자에 담긴 내용의 주제는 우연 그 자체이다. 암스테르담의 프로보스 투사들은 자신의 무정부주의 시위를 ‘해프닝스’라고 불렀다. 피에르 쉐페르에 의해 전개된 뮈지크 콩크레떼의 연주들에서 인간의 언어는 우연히 발생되는 뒤틀린 소리로 재현된다. 그 소리에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순하디 순한 여성이 그 자리에서 죽어 썩어 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그의 영화 「침묵」에서 사람들의 인생을 재현하기 위해 외설적 장면들을 단편적으로 짜 집어 놓는다. 존 오스본은 「마르틴 루터」라는 연극에서 역사의 우연성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 준다. 그 연극은 자네는 자네가 옳다고 생각하는가?, 라는 한 수도원장의 물음에 대해 그렇게 되기를 바랍시다, 라는 루터의 대답으로 끝난다. 헨리 밀러는 지금 이곳의 개별적인 인간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범우주 속에서 새로운 존재가 새롭게 부상할 것이기 때문에, 개인상호간의 진리, 개인적인 의미는 무의미하며 그래서 개인적인 섹스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말 것을 제언한다.
객관적 진리가 없다면, 문화를 근거지울 만한 공통의 기반 또한 있을 수 없고, 공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연적인 사교를 통해 연대성이 창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문화와 가치>에서 자신이 유럽 문화에 대해 아무런 연대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으며, 자신이 적극적으로 헌신할 만한 공적 삶이 없음을 한탄했다. 만일 사람들 사이에 공통의 담론이 없다면, 자신의 사적인 삶을 공적인 삶과 연관시킬 방도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티는 <우연성․아이러니․연대성>에서 우연성에 의해 연대성이 창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객관적 진리 없이 사람들 사이의 연합이나 협력이 가능하며, 인간은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우연성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유를 준다. 그의 유토피아는 객관적 진리 없이 사교할 수 있는 사교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창조의 영역과 연대성의 영역을 모종의 기초를 통해 연결시키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시도는 공통된 인간의 본성을 요구하는데, 그러한 본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본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집요하게 주장했다. 바로 이 사실을 잘 아는, 다시 말해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근거지우려는 모든 시도가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토피아를 희망하기 때문에 아이러니스트가 된다.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자아․언어․공동체가 모두 우연의 산물이라는 것을 직시하면서, 동시에 행운이 따르기를 희망하는 사람이다. 로티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는 고생이 감소될 것이라는 희망, 다른 인간들에 의한 인간의 치욕이 멈추게 되리라는 희망이 근거지울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정말로 희망하는 자는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리라는 희망 또한 가진다. 만일 그가 자신의 희망이 성취되리라는 가망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그것을 더 이상 희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망이 실현될 가능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희망하는 것을 위해, 그 희망을 근거지우려는 소망을 가진다. 우리는 인간이 물질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을 근거짓기 위해, 우리 자신이 바로 이러한 희망을 가진다는 엄연한 사실로부터 우리의 연구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이 논문에서 채택했던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욕구․의도․믿음 등의 본성을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희망이 성취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모종의 객관적 진리 위에 근거지우려 했다. 따라서 우리의 방법은 우리의 목표와 분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심적인 것의 진정성을 연구하려는 우리의 의도 자체가, 그 진정성의 관건이 된다. 우리의 의도는 심적인 것의 이유가 되고, 이유는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 논문 제2장에서 데이빗슨의 의미론을 통해 사람의 믿음이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2.4절의 원초적 해석론에서 사람의 믿음이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생각했다. 이때 믿음-의미-진리, 이 삼자를 연결시키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심적인 것의 전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인데, 이 전체성은 마음 공동체에까지 적용된다. 사랑은 심적인 것의 영역을 물리적 법칙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만드는 힘의 표현이다. 사랑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지는 제3장에서 이미 충분히 살펴 보았지만,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믿음의 내용은 사랑의 원리를 준수하는 올바른 해석 상황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랑의 원리란, 삶의 전영역에서 타자의 진실됨을 인정하면서, 타자의 발화를 해석하라는 지침이다. 데이빗슨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예컨대 타자를 해석할 때, 그를, 참된 것을 믿고 좋은 것을 사랑하는 자로서, 최소한 참된 것을 믿으려 하고 좋은 것을 사랑하려는 자로서 인정하라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를 해킹처럼 일종의 언어 제국주의로, 또는 루트처럼 날카로운 주지주의로, 아니면 퍼트남처럼 물러터진 온정주의 또는 평등주의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의 원리는 특정한 신념의 일치 또는 과학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사랑이란 단지 타인의 마음에 다가서려는 최소한의 자세이다. 데이빗슨의 사랑의 원리는 해석 전에 해석자와 피해석자 사이의 공통된 본성을 미리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석자의 태도를 시뮬레이션하는 그랜디의 인간성의 원리와 다르다. 그리고 구체적인 지침이 명기된 루이스의 개선된 사랑의 원리와 달리, 데이빗슨의 사랑의 원리는 명확한 세부지침을 포함하지 않는다.
해석에 사랑의 원리를 적용시킬 때만, 믿음의 내용은 명제적 내용을 지니게 되고,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명제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외부 세계이다. 만일 외부 세계가 없다면, 사람의 믿음은 의미를 지닐 수 없고, 심지어 믿음을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세계가 없다면 해석자는 타자를 해석할 수 없다. 그리고 타인이 없으면 자기 믿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타인에 의해 한 번도 해석되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자기-해석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해석을 할 수 없다면,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해석은 언제나 세계와 타자를 전제한다. 이것은 사랑의 원리 속에 표현되어 있는 핵심적인 전제이다. 사랑의 원리의 함축은 해석을 위해 공동체와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에 의해 타인을 해석한다는 것은, 그가 자신과 같은 공동체와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사랑의 원리에서 폐기될 수 없는 부분은 공동체와 세계의 공유이고, 나머지 세부적 정책은 해석 과정 속에서 언제나 수정되고 개정될 수 있다. 맬파스는 데이빗슨의 사랑의 원리를 폐기될 수 있는 방법론적 측면과, 폐기될 수 없는 기본전제적 측면으로 나누기도 했다.
타자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타자를 해석하는 것, 즉 원초적 해석이 성공하였다고 생각해 보자. 해석이 성공하였다는 것은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해석자와 피해석자가 서로의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없는데도 서로의 마음을 읽고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대화참여자들이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해석자와 피해석자는 해석 상황에서 공적인 언어를 창출한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의 해석을 통해 발생된다. <진리와 방법>에 나오는 가다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언어의 발견은 ‘이해의 목적을 위한 도구의 준비가 아니라, 오히려 이해의 바로 그 행위와 동일하다’. 사랑의 원리 아래서 성공적인 의사소통이 없다면, 언어가 머물 자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언어란 말하는 이들이 대화 속에서 안출한 공적인 개념들이다. 만일 언어가 ‘학습되어야 하거나, 숙달되어야 하거나, 또는 지니고 태어나야 하는’ 어떤 것이라면, 이런 언어는 의사소통에 본질적이지 않다. 대신 의사소통에서 본질적인 것은 해석 상황에서 안출된 마음의 언어이다. 사람들의 마음들이 공적으로 대화할 수 있다면, 이 마음들은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사랑의 원리를 따라 의사소통하는 해석자와 해석되는이는 마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마음의 공동체가 설립될 때, 사랑의 원리는 그 이념을 달성한 셈이다. 마음의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의 각 마음은 합리적 융화를 이루고, 이들의 마음은 한마음이 된다.
데이빗슨의 해석론은, 해석자가 화자의 발화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의사소통의 본성을 밝히려는 의도로 고안되었다.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 화자는 해석가능한 존재가 되어야 하고, 해석자는 화자를 해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해석자와 화자 사이의 의사소통은 양자가 의미를 공유할 수 있을 때 가능해질 것이다. 의미와 믿음 사이의 불리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믿음의 본성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람이 어떤 믿음을 가지는 것은 심적인 사건인데, 화자와 해석자가 심적인 사건을 공유하고, 이것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은, 심적인 사건이 물리적 사건과 구별되는 별도의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이제 데이빗슨이 처음에 의도했던 해석의 방법론에 관한 문제는, 심적인 사건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의 물음으로 되물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심적인 사건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은 사유의 조건이기도 하고, 인식의 조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해석의 방법론이 사랑의 원리를 해석에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라면, 사랑의 원리는 곧 심적인 사건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이면서 사유의 조건이다. 사유의 조건은 하나의 피조물이, 사랑의 원리 아래에서,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다른 피조물에 의해 해석되고 그를 해석할 수 있을 때, 충족된다.
사랑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공유와 공동체의 공유이다. 사랑이 사유를 생성시키기 위해 왜 이런 전제가 필요한지 개략해 보자. 사람이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를 믿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타의 수많은 믿음들이다. 예컨대 ‘나는 생각한다’를 믿기 위해, 그는 이미 ‘나’에 대한 믿음들, ‘생각한다’에 대한 믿음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물론 수 많은 믿음들을 가지기 위해, 그는 응당 하나의 믿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최소한 하나의 믿음을 가지기 위해, 그는 믿음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믿음은 틀릴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이다. 어떤 피조물이 믿음에 대한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이 틀릴 때와 옳은 때에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믿음을 가지기 위해 사람은 참과 거짓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때 타자와 객관적 세계가 없다면, 사람이 이 기준을 가지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객관적 세계를 공유하는 두 피조물이 해석을 통하여 공적인 언어를 창출할 때, 그들은 진리의 기준으로서 마음의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고, 이때 비로소 참과 거짓에 대한 기준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피조물이 사유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공동체와 세계가 필요하다. 만일 해석자가 보는 세계가 피해석자가 보는 세계와 다르다면, 해석자는 피해석자를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동일한 세계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한마음은 불가능하고, 결국 사람은 해석가능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사랑의 원리는 사람들이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음을 선언하는 원리이기 때문에, 만일 이 원리가 거짓이라면,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사랑의 원리를 해석의 올바른 지침으로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마음 공동체와 공통 세계를 얻는다. 이 양자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세계와 세계에 대한 사유 방식을 공유하고, 이런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는 피조물들만이 마음의 공동체를 설립할 수 있다. 이 공동체 속에 참여할 때, 하나의 피조물은 객관적 진리 개념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믿음 개념을 가지게 되며, 하나의 믿음을 그리고 나아가 수많은 믿음들을 가지게 되고, 최종적으로 명제적 태도를 지닐 수 있다. 명제적 태도를 지닐 수 있는 피조물만이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앎을 가지게 된다. 예를 들어, 그는 ‘나는 생각한다’라고 믿을 수 있다. 하나의 피조물은 마음의 공동체 속에서만 자기 반성을 할 수 있다. 자기 반성이 가능한 피조물을 우리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물론 반대로 자기 자신의 마음에 대한 앎이 없다면 또는 자기반성이 없다면 여타의 다른 앎도 불가능하다. 이것은 자기의 마음에 대한 지식과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 그리고 자연 세계에 대한 지식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이 세 유형의 지식은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다른 두 유형을 하나의 유형으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도 있었으며, 어떤 유형의 지식을 의심하면서 다른 유형의 지식은 의심하지 않는 회의주의도 있었다. 데이빗슨은 이러한 두 시도가 모두 앎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인식은 이 세 유형의 지식이 동시에 성립될 수 있을 때만 유의미하다. 그래서 사람의 인식에 있어서 세 가지 종류의 지식은 필수불가결하고 상호의존적이다.
따라서 사랑의 원리에 의해 비로소 성립되는 사람의 인식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자기의식 없이, 타자 없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불가능하다. 세계 없이, 자기의식 없이, 타인과 의사소통할 수 없다. 세계 없이, 타자 없이, 자기반성은 불가능하다.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적 현상학>에서 훗설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의식과 타자에 대한 의식은 분리될 수 없고, 타자에 대한 의식은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의식 속에 함축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타자가 없다면, 우리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어떤 피조물이 합리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하는 사람이기 위해, 그는 먼저 人-間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아름다운 말은 이렇게 재기술될 수 있다: coexisto ergo sum. 만일 타인을 생각하며 사는 것 또는 타인과 더불어 사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바로 사랑이 존재를 낳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사랑 없이 실존할 수 없다. 나와 내가 같은 세계 속에서 말을 나눌 때, 나는 생각할 수 있고,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인-간이 되기 위해 몸을 가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몸을 가질 때 세계 속에 거주할 수 있고, 세계 속에 거주할 수 있을 때 타인과 세계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미론은 마음과 세계의 연결의 문제이고 몸이 없으면 세계와 접촉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몸 없이 의미론을 가질 수 없다. 의미론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사유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의 조건에서 몸의 형체화가 우연적 측면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메를로-퐁티에 의해 강조된 바이다.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몸이 인간 영혼의 가장 훌륭한 그림’이라고까지 표현했다.
로티는 객관적 진리를 포기함으로써 객관적 진리에 의해 억압받지 않는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희망했다. 그러나 객관적 진리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객관적 진리를 버릴 것이 아니라, 객관적 진리와 함께 사유하고 살아야 할 것이다. 객관적 진리와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마음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마음들의 공동체에 가담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같은 세계 속에 살고 있는 타인의 마음과 합리적 융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마음의 사랑이다. 만일 당신이 사랑으로 타인과 대화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객관적 진리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랑 없이, 예컨대 진실된 마음 없이 그리고 객관적 세계를 배제한 환상 속에서, 약정적 언어를 주고 받는다면, 우리는 결국 체면에 걸리고 말 것이다. 만일 어떤 공동체가 세계의 진상을 의도적으로 막고, 진실된 마음을 봉쇄한 채, 대화나 관심 대신에 서로를 감시한다면, 그 공동체는 한스-요아킴 마즈의 표현처럼 ‘사이코의 섬’이 될 것이다. 반대로, 정신병을 치료하려면, 우리는 사랑의 원리에 따라 아름다운 자연세계 속에서 타인과 대화하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한 공동체가 병들지 않기 위해, 최소한 한 명이라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만일 사랑이 불가능하다면, 심적 사건이 출현할 수 없다. 사랑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아는 존재가 된다. 사랑 때문에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른 말할 수 있다. 감각기관이 고장나도 사람은 여전히 해석가능하다. 사람은 본성상 해석가능하고 사람의 믿음은 참말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본성상 해석가능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타인에게 해석되지 못한다면,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했고 해석되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정말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았더라면, 그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이지 이 곳 땅 위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들인지 모른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대로 우리는 아직-아닌-존재들 또는 아직-아닌-의식들이다. 따라서 때가 늦기 전에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동료들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타인들과 대화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정녕 모를 것이고 우리 또한 우리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나는 사랑하며 사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 사막같은 땅에서도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 없다고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세계 속에 오직 물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의 소리를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런 믿음을 가지든, 그들이 그런 믿음을 가지든 우리는 때가 늦기 전에 서로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가 이런 대화를 진심으로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리가 무엇이뇨? 바로 내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선이 무엇이뇨? 우리가 사랑으로 대화하는 것입니다. 미가 무엇이뇨? 이렇게 마주보는 얼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