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철학김명석 2001, 원자론에서 전체론으로

원자론에서 전체론으로

자연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경북대 의대 정신의학 GRAND ROUNDS 2001


김명석



1. 들어가는 말

데카르트1596-1650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품목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하나는 사고하는 사물res cogitans이고, 다른 하나는 연장된 사물res extensa이다. 이들 두 실체 사이에는 항구적인 분할이 존재하는데, 이 분할은 개념적 분할이 아니라, 존재론적 분할이다. 세계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실체이원론substance dualism은 응당 학문의 분열을 야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학문science이란 존재하는 것들에 관한 앎의 체계인데, 만일 존재하는 것들이 두 부류로 엄격하게 양분된다면 학문 역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물질에 관한 앎의 체계로서 물리과학(물리학)이 있고, 다른 편에서는 마음에 관한 앎의 체계로서 정신과학(심리학)이 있다. 이러한 분할을 기화로, 물리과학 또는 자연철학은 본격철학(제일철학)으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근대과학의 발흥은 물리과학과 정신과학의 이혼을 더욱 부추겼으며, 중세가 학문의 암흑시대인 것처럼, 근세는 학문들의 갈등시대가 되었다. 현대에도 여전히 두 과학 사이의 세력다툼, 흡수통합, 독립선언 등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두 과학의 화해 무드는 현대과학의 뚜렷한 특징 중에 하나이다.

원래 ‘자연과학’natural science에서 ‘자연’nature은 물질만을 가리키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384-322 BC는 세계를 자기 스스로 움직이는, 또는 자기 스스로 자라나는 존재들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는 희랍어 퓌시스physis의 다양한 의미들(생성, 출생, 성장, 본성)을 분석한 후, 퓌시스를 ‘그 자신 안에 운동의 원천을 포함하고 있는 것들의 본성’으로 정의했다. 물리학physics은 이 퓌시스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따라서 만물 속에 깃들어 있는 운동․변화․생성․성장의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지, 오직 물질에 관해서만 탐구하는 학문이 아니다. 퓌시스에 상응하는 라틴어는 나투라natura[to be born]이며, 여기에서 영어의 네이쳐nature가 유래했다. 이 점을 유의한다면, 자연과학의 자연을 데카르트적 물질세계와 동일시할 필요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만물은 자연적 목적telos에 의해 생동하며, 퓌시스는 그 목적을 향해 움직이게 하는 내적 추진력이다. 물리학이, 학제상, 철학으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은, 갈릴레이1564-1642를 기점으로, 퓌시스에 대한 이러한 목적론적 해석이 거부되고, 역학적․기계론적 개념이 등장한 이후부터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물리학은 답보하고 있었으며, 근대과학의 출현이 거의 2000년간 지연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었다는 점에서, 혹자는 과학 발전을 저해한 제일 원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목하곤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과학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들 중에는 근대 기계론적 패러다임의 기세가 점차 꺾이고, 목적론적 관점이 복원되고 있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다. 세계를 성장해 가는 유기적 전체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성장 과정 중에 있는 실재 개념을 들고 나온 화이트헤드1861-1947에 의해 복원되는 듯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패러다임을 붕괴시키고 기계적 패러다임을 전면에 내세운 이들은 근대 원자론자들이다. 중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속박으로부터 탈주와 신과학운동을 주도했던, 피에르 가상디1592-1655, 데카르트, 로버트 보일1627-91 등은 데모크리토스460-371 BC의 원자론을 물리과학의 토대로 삼았다. 이들은 데모크리토스가 그리하였던 것처럼, 물질의 화학적․의학적 성질들이 연장성, 불가투과성, 운동, 모양, 크기 등과 같은 물질의 역학적 성질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 주려고 노력했었다. 근대 원자론은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아이작 뉴턴1642-1727의 물리학에서, 정신과학 분야에서는 존 로크1632-1704의 인식론에서 그 위력을 십분 발휘했다. 로크 인식론에서 관념idea은 정신과학적 (또는 심리학적) 원자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이 원자들의 집성이듯이, 모든 인식은 관념의 조합이다. 그러나 근대과학의 교리와도 같았던 원자론은 현대 물리학의 등장 이후 그 권위를 점차 상실하게 된다. 우리의 주제는 이 과정과 결과를 개괄하는 것이다. 20세기에 일어난 이 대전환의 중요성을 감지하기 위해, 먼저 근대과학의 기본적 자연기술방식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제2절에서 이것을, 비교적 소상하게, 다룰 것이다.

근대[자연]철학자들이 개시했던 신과학 운동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뉴턴 물리학은 고중세와 특히 르네상스 시기에 풍미했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극복하고, 천상의 법칙과 지상의 법칙, 그리고 무생물의 법칙과 생물의 법칙을 통합했지만, 이 통합의 부작용으로 발생한 결정론과 기계적 유물론은 인간성 상실의 위기, 학문의 위기(훗설)를 초래했다. 뉴턴 물리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근대과학이 은연중에 또는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전제들은 대충 다음과 같다. (i) 원질의 삼분: 시간과 공간 및 물질의 분리, (ii) 주객분리: 자연현상과 관찰․인식과정의 상호독립성, (iii) 원자론: 전체우주로부터 부분적 관찰대상의 분리가능성, (iv) 기계론: 자연으로부터 정신과 목적의 분리 내지 배제 등. 그러나 이러한 전제들은 20세기 새로운 물리학이 등장함으로써 점차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양자역학은 (ii)와 (iii)을 문제시했던 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주로 (i)과 (ii)를 문제삼았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따로 분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님을 보여주었고,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공간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상대론적 양자역학(양자장론)은 시공간과 물질의 연속성을 지지했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인지과정에서 측정수단(빛)과 측정대상이 피할 수 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인지과정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하는 빛이 오히려 시공간을 규정하고, 이 빛은 다시 물질과 상호전환될 수 있다. 따라서 시공간은 물질들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 단순한 빈 공터가 아니라, 빛과 물질이 만들어낸 동시에 그것들을 만들어내는 생동하는 마당이다. 한편 양자역학은 더욱 강력히 자연현상이 관측장치나 관찰행위 등과 무관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했으며, 여기서 더 나아가 관측대상이 관측장치와 관측자를 포함한 나머지 우주와 분리될 수 없다는 인식을 형성시켰다. 제3절에서, 나는 상대성이론에 대해서는 일단 논외로 하고, 양자역학이 몰고 온 새로운 패러다임을 해설하고 그 함축과 전망을 제시할 것이다.



4. 나오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근대자연과학의 핵심교리라 할 수 있는 원자론이 전체론으로 대체되는 과정과 이유를 살펴보았다. 양자역학적 세계는 부분들의 집적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부분들의 성격과 본성은 전체의 속성에 의해 영향받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하는 것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이다. 원자는 세계의 한 측면에 불과하고, 그 측면들의 총합은 세계와 동일하지 않다. 세계는 그런 측면들의 종합물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오히려 측면들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그리고 전체 세계를 알지 못하는 한, 측면들에 관한 주장들은 그만큼 불완전하고 불충실하다.

양자역학적 세계그림이 원자론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계론의 대안도 될 수 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새로운 과학은 과연 목적론을 수용할 수 있는가? 글을 맺기 전에, 양자역학이 기계론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지 그 전망을 간략하게 제시하고자 한다. 나는 양자역학이 하향인과downward causation와 목적론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향인과란 상위체계(전체)가 하위체계(부분)에 인과작용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전체로서 두뇌는 두뇌의 개별 뇌세포에 인과작용을 미칠 수 있다. 양자역학적 세계에서는 몸의 한 세포가 다른 세포와 비국소적으로 (비록 둘 사이에 전자기 시그널이나 생화학 물질의 교류가 없다 하더라도)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상상력을 한 번 발휘하여,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면 어떨까? 한 유기체의 몸통 전체가 양자역학적으로 서로서로 얽혀 있어entangled, 상위체계가 하위체계에 하향인과작용을 할 수 있을 경우, 그 유기체는 생명을 지니게 되고, 하향인과작용이 상실될 때 점차 생명을 잃게 된다.

설사 우리가 하나의 통일체로서 두뇌를 의식과 동일시한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는 의식을 개별 뇌세포들의 집합체와 동일시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정신은 최소한 온두뇌 또는 온몸이지, 뉴런 다발이거나, 세포들의 집단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마음 또는 의식은 온우주의 속성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 나는 여기서 마음이 물리현상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개별적 물리사건들의 복합체로 보지 않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방금 제시된 모델에 의하면, 정신은 현상을 구성하는 실질적 힘을 가질 수 있으며, 따라서 정신(전체로서 세계)의 목적과 의도가 세계를 움직이며, 최소한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차이를 발생시킨다.

이미 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한 개인의 마음 속에는 인류와 생명의 전체 역사가 침전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도날드 데이빗슨1917-은 한 사람의 한 생각과 말이 그에게 일어나는 다른 모든 심적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현대물리학은 한 지역의 사건 속에, 마치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우주전체의 다른 사건이 비국소적으로 연결․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심리학과 철학, 물리학에서 각기 독립적으로 제기된 이러한 전체론들은 그 주제에 있어서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자역학이 의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거나, 무엇보다 물리학이 심리학이나 철학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온전한 통일체로서 자아가, 자기자신을 직접 봄으로써, 말하자면 일자가 일자를 봄으로써, 또는 이성이 이성을 가늠함으로써, 말이 말하게 함으로써, 자기의 존재한계․인식한계․언어한계인 세계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희망을, 물리학의 운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파악한 세계가 현실적 세계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짓궂은 질문이 제기될 때, 철학자는 불현듯 과학자(물리학자)와 적대적인 입장에 설 필요가 없다. 물리학자의 시선과 언어도, 태생적으로, 세계내존재의 원시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철학자는, 고대 자연철학자들처럼, 자신들이 파악한 세계가 그들의 세계와 완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만일 어떤 철학자나 심리학자가 또는 인문학자가 그러한 조화를 실제로 성취하기를 바란다면, 현대 자연과학의 태도변경에 호의적인 시선을 던져도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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