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페도클레스와 콰인
대동철학 12: 63-89, 대동철학회 2001
간추림
자연주의는 인식론이 선험적 이론이 아니라, 자연과학 또는 심리학의 한 부분일 것을 요구한다. 특히 콰인은 「자연화된 인식론」(1968)에서, 근대 인식론의 기초주의적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감각적 입력과 인지적 출력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자연주의 인식론의 첫 형태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글은 콰인의 인식론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희망하며, 엠페도클레스의 인지과학을 해명 및 해설하는 데 집중하였다.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에서, 인식과정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인식대상으로부터 물질적 분말이 방출되고, 그 방출물들은 감각기관의 구멍 속으로 유입된다. 방출물이 구멍에 들어맞을 경우 지각이 성립되고, 육체 속으로 들어온 방출물이 혈액 속의 원소 배합을 변경시킬 때, 사고의 변화가 야기된다. 한편 콰인은 ‘방출물’ 대신, ‘자극’ 또는 ‘신경유입’을 외부세계에 관한 정보의 원천으로 간주했는데, 그의 자연화된 인식론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1. 들어가는 말
김재권 교수가 “우리 시대 철학계의 수퍼 스타”라고 예찬했던 콰인(W. V. Quine)은 2000년 12월 25일에 사망했다. 그는 50세가 되기 몇 년 전, 물리적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아주 재미있게 표현했다.
나는 물리적 세계 속에 놓여 있는 하나의 물리적 사물이다. 이 물리적 세계의 힘들 중 몇몇이 나의 피부에 부딪친다. 광선들은 나의 망막을 때리고, 분자들은 나의 고막과 손가락 끝에 충격을 가한다. 나는 원형의 공기파를 발산함으로써 되받아 친다. 이러한 파동들은 책상, 사람, 분자, 광선, 망막, 공기파, 소수, 무한 집합, 기쁨과 슬픔, 선과 악에 관해서 연달아 쏟아내는 담론 형태를 취한다.
전통적으로 인식론자는 지식의 기원이나 본성 또는 인식의 방법과 한계 따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콰인은, 물리적 세계 속에서 물리적으로 살아가는 자기 위상에 걸맞게, 인식론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재설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식론을 ‘자연화된 인식론’이라 불렀다.
세계에 관한 정보의 유일한 채널은 우리의 감각적 표피 위에 [가해지는] 외력의 충격이다. 학문 그 자체가 그렇게 말한다. 신통력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계에 대한 성숙된 학문적 이론을 얻을 수 있었는가? 이것은 그 자체로 학문적 질문이다. 학문적 이론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이 질문[의 답]을 추구하는 [학문]을 나는 자연화된 인식론이라 부른다.
그는 대략 1950년대부터 줄곧 “오직 감각적 증거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세계이론에 도달하게 되는가?”(RR, 1)라는 물음에 매달렸다.
인식론을 자연화한다는 것은 인식과정을 자연현상으로 환원시키거나, 물리적 용어를 사용하여 재기술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자연주의 인식론의 첫 형태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콰인의 인식론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희망하며, 엠페도클레스의 인지과학을 해명 및 해설해 보았다. 필경 우리는 두 사람의 인지과학이 그 기본적 패러다임에서 얼마나 유사한지 보게 될 것이다.
먼저 제2장은 엠페도클레스의 영혼론에 대해 정리해 놓았는데, 그에 의하면, 영혼은, 기능적으로 볼 때, 육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조화로운 배합이며, 질료적 차원에서 볼 때, 혈액과 동일시될 수 있다. 제3장은 소위 ‘類로써 類’ 논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그의 방출이론을 취급했다. 이 장에서 소상하게 해설된 엠페도클레스의 ‘방출물’은 일종의 인식론적 매개물인데, 제5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개념은 콰인의 ‘신경유입’과 동등한 역할을 한다. 근세 철학에서 이에 대한 대응물은 바로 ‘인상’ 또는 ‘관념’이다. 제4장은 엠페도클레스 이후의 인식이론들, 예컨대 데모크리토스, 아리스토텔레스, 로크 등의 이론을 개괄함으로써, 그들에 의해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원천으로 상정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특별히 ‘정보’라는 개념이 어원학적으로 어떻게 발상되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5장은 이상에서 논의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의 기본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고, 나오는 말에서 그 개념들의 모호성을 지적했다.
6. 나오는 말
자연주의 인식론의 목표는 인식 정당화 문제를 일단 도외시하고, 인식 과정을 인과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앎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자연주의 인식론의 최초 형태로서 우리는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을 살펴보았다. 이 이론에서 인식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인식대상으로부터 물질적 분말이 방출되고, 그 방출물들은 감각기관의 구멍 속으로 유입된다. 이 방출물은 외부세계로부터 발산되었고, 외부세계의 ‘피시스’와 ‘로고스’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세계의 정보를 전달해 주는 적당한 매체로 간주된다. 방출물이 구멍에 들어맞을 때 지각이 성립되고, 육체 속으로 들어온 방출물이 혈액 속의 원소 배합을 변경시킬 때, 사고의 변화가 야기된다. 데모크리토스의 보다 진보한 이미지이론에 의하면, 인식대상으로부터 방출된 입자들은 인식대상의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이것이 감각기관 속의 원자들과 결합함으로써, 감각 속에 인식대상을 재형상화한다.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은 사람의 지각과 사고가 외부세계의 피시스와 로고스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콰인은 ‘방출물’ 대신, ‘자극작용’ 또는 ‘신경유입’을 외부 세계에 관한 정보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콰인 인식론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콰인이 외부세계의 본성과 인식결과 사이의 연결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루지 않고, 단지 자연화된 인식론의 출발개념에 해당하는 ‘정보’, ‘증거’, ‘자극’, ‘자극작용’, ‘신경유입’ 등과 같은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런 개념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될 수 있겠다.
첫째, 콰인의 ‘정보’ 개념에 대해 몇몇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는 정보와 정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신경유입이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의 원천이라 말할 때, ‘정보’는 이미 해석된 판단을 가리킬 수 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하여 콰인은 정보를 보다 엄밀하게 정의하려고 한다. 정보는 모종의 지식 또는 의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공학자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 정보이다. 따라서 정보는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신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에너지 흐름’(energy flow; RR, 4-12) 또는 ‘전류’(current)이다. 만일 정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면, ‘신경유입은 정보의 원천이다’는 표현은 공허하게 된다. 왜냐하면, 새롭게 정의된 정보 개념은, 콰인 인식론 체계에서 볼 때, 신경유입 개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정보전달 매체로서 상정된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의 ‘방출물’은 인식대상의 원소적 본성이나 로고스, 또는 그것의 이미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외부세계에 관한 정보를 주체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콰인의 신경유입이 어떻게 외부세계의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둘째, 콰인에게 ‘증거’라는 개념은 엄밀하게 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술적 용어로서 증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학문을 위한 증거에 대한 의문들을 취급할 수 있다”(PT, 2). 그리고, “증거는 내가 개괄적 또는 요약적 정식화에서 약식으로 사용했던 용어이다. 나는 보다 세밀한 탐구에서 이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RLH, 575). 그리고 콰인은 자신의 ‘증거’에 대한 데이빗슨의 비판에 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나의 증거이론에서 증거라는 용어가 아무런 해명을 얻지 못하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학문을 위해 존재하는 증거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감각적 증거”(EN, 75)라는 콰인의 핵심 논제는 그만큼 초점을 잃게 된다.
셋째, 콰인에게 ‘증거’가 약식으로 사용된 용어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극작용 또는 신경유입은 ‘증거’가 될 수 없다. 신경유입은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도,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추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데이빗슨의 기준에 의하면, 진술과 그 진술의 증거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 관계여야 하기 때문에, 명제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한 신경유입은 하나의 진술 또는 믿음, 그 믿음을 표현하는 문장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엠페도클레스와 콰인
대동철학 12: 63-89, 대동철학회 2001
간추림
자연주의는 인식론이 선험적 이론이 아니라, 자연과학 또는 심리학의 한 부분일 것을 요구한다. 특히 콰인은 「자연화된 인식론」(1968)에서, 근대 인식론의 기초주의적 프로그램이 성공할 수 없음을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서 감각적 입력과 인지적 출력 사이의 인과적 관계를 탐구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제시했다. 자연주의 인식론의 첫 형태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 글은 콰인의 인식론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희망하며, 엠페도클레스의 인지과학을 해명 및 해설하는 데 집중하였다.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에서, 인식과정에 대한 설명은 매우 간단하다. 인식대상으로부터 물질적 분말이 방출되고, 그 방출물들은 감각기관의 구멍 속으로 유입된다. 방출물이 구멍에 들어맞을 경우 지각이 성립되고, 육체 속으로 들어온 방출물이 혈액 속의 원소 배합을 변경시킬 때, 사고의 변화가 야기된다. 한편 콰인은 ‘방출물’ 대신, ‘자극’ 또는 ‘신경유입’을 외부세계에 관한 정보의 원천으로 간주했는데, 그의 자연화된 인식론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과 매우 흡사하다.
1. 들어가는 말
김재권 교수가 “우리 시대 철학계의 수퍼 스타”라고 예찬했던 콰인(W. V. Quine)은 2000년 12월 25일에 사망했다. 그는 50세가 되기 몇 년 전, 물리적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위치를 아주 재미있게 표현했다.
나는 물리적 세계 속에 놓여 있는 하나의 물리적 사물이다. 이 물리적 세계의 힘들 중 몇몇이 나의 피부에 부딪친다. 광선들은 나의 망막을 때리고, 분자들은 나의 고막과 손가락 끝에 충격을 가한다. 나는 원형의 공기파를 발산함으로써 되받아 친다. 이러한 파동들은 책상, 사람, 분자, 광선, 망막, 공기파, 소수, 무한 집합, 기쁨과 슬픔, 선과 악에 관해서 연달아 쏟아내는 담론 형태를 취한다.
전통적으로 인식론자는 지식의 기원이나 본성 또는 인식의 방법과 한계 따위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콰인은, 물리적 세계 속에서 물리적으로 살아가는 자기 위상에 걸맞게, 인식론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재설정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식론을 ‘자연화된 인식론’이라 불렀다.
세계에 관한 정보의 유일한 채널은 우리의 감각적 표피 위에 [가해지는] 외력의 충격이다. 학문 그 자체가 그렇게 말한다. 신통력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계에 대한 성숙된 학문적 이론을 얻을 수 있었는가? 이것은 그 자체로 학문적 질문이다. 학문적 이론을 자유롭게 활용하면서 이 질문[의 답]을 추구하는 [학문]을 나는 자연화된 인식론이라 부른다.
그는 대략 1950년대부터 줄곧 “오직 감각적 증거만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세계이론에 도달하게 되는가?”(RR, 1)라는 물음에 매달렸다.
인식론을 자연화한다는 것은 인식과정을 자연현상으로 환원시키거나, 물리적 용어를 사용하여 재기술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자연주의 인식론의 첫 형태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콰인의 인식론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희망하며, 엠페도클레스의 인지과학을 해명 및 해설해 보았다. 필경 우리는 두 사람의 인지과학이 그 기본적 패러다임에서 얼마나 유사한지 보게 될 것이다.
먼저 제2장은 엠페도클레스의 영혼론에 대해 정리해 놓았는데, 그에 의하면, 영혼은, 기능적으로 볼 때, 육체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조화로운 배합이며, 질료적 차원에서 볼 때, 혈액과 동일시될 수 있다. 제3장은 소위 ‘類로써 類’ 논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그의 방출이론을 취급했다. 이 장에서 소상하게 해설된 엠페도클레스의 ‘방출물’은 일종의 인식론적 매개물인데, 제5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개념은 콰인의 ‘신경유입’과 동등한 역할을 한다. 근세 철학에서 이에 대한 대응물은 바로 ‘인상’ 또는 ‘관념’이다. 제4장은 엠페도클레스 이후의 인식이론들, 예컨대 데모크리토스, 아리스토텔레스, 로크 등의 이론을 개괄함으로써, 그들에 의해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원천으로 상정된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이 장에서는 특별히 ‘정보’라는 개념이 어원학적으로 어떻게 발상되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5장은 이상에서 논의된 것을 염두에 두면서, 콰인의 자연화된 인식론의 기본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고, 나오는 말에서 그 개념들의 모호성을 지적했다.
6. 나오는 말
자연주의 인식론의 목표는 인식 정당화 문제를 일단 도외시하고, 인식 과정을 인과적으로 기술함으로써, 앎의 본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자연주의 인식론의 최초 형태로서 우리는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을 살펴보았다. 이 이론에서 인식과정은 매우 간단하다. 인식대상으로부터 물질적 분말이 방출되고, 그 방출물들은 감각기관의 구멍 속으로 유입된다. 이 방출물은 외부세계로부터 발산되었고, 외부세계의 ‘피시스’와 ‘로고스’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세계의 정보를 전달해 주는 적당한 매체로 간주된다. 방출물이 구멍에 들어맞을 때 지각이 성립되고, 육체 속으로 들어온 방출물이 혈액 속의 원소 배합을 변경시킬 때, 사고의 변화가 야기된다. 데모크리토스의 보다 진보한 이미지이론에 의하면, 인식대상으로부터 방출된 입자들은 인식대상의 이미지를 담고 있으며, 이것이 감각기관 속의 원자들과 결합함으로써, 감각 속에 인식대상을 재형상화한다.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은 사람의 지각과 사고가 외부세계의 피시스와 로고스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콰인은 ‘방출물’ 대신, ‘자극작용’ 또는 ‘신경유입’을 외부 세계에 관한 정보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콰인 인식론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은 엠페도클레스의 방출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콰인이 외부세계의 본성과 인식결과 사이의 연결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루지 않고, 단지 자연화된 인식론의 출발개념에 해당하는 ‘정보’, ‘증거’, ‘자극’, ‘자극작용’, ‘신경유입’ 등과 같은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았다. 이런 개념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이 지적될 수 있겠다.
첫째, 콰인의 ‘정보’ 개념에 대해 몇몇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는 정보와 정보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신경유입이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의 원천이라 말할 때, ‘정보’는 이미 해석된 판단을 가리킬 수 있다. 이런 비판에 직면하여 콰인은 정보를 보다 엄밀하게 정의하려고 한다. 정보는 모종의 지식 또는 의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공학자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 정보이다. 따라서 정보는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신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에너지 흐름’(energy flow; RR, 4-12) 또는 ‘전류’(current)이다. 만일 정보를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면, ‘신경유입은 정보의 원천이다’는 표현은 공허하게 된다. 왜냐하면, 새롭게 정의된 정보 개념은, 콰인 인식론 체계에서 볼 때, 신경유입 개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정보전달 매체로서 상정된 엠페도클레스와 데모크리토스의 ‘방출물’은 인식대상의 원소적 본성이나 로고스, 또는 그것의 이미지를 담고 있기 때문에, 외부세계에 관한 정보를 주체에게 전달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콰인의 신경유입이 어떻게 외부세계의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둘째, 콰인에게 ‘증거’라는 개념은 엄밀하게 규정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술적 용어로서 증거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학문을 위한 증거에 대한 의문들을 취급할 수 있다”(PT, 2). 그리고, “증거는 내가 개괄적 또는 요약적 정식화에서 약식으로 사용했던 용어이다. 나는 보다 세밀한 탐구에서 이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RLH, 575). 그리고 콰인은 자신의 ‘증거’에 대한 데이빗슨의 비판에 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나의 증거이론에서 증거라는 용어가 아무런 해명을 얻지 못하며,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학문을 위해 존재하는 증거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감각적 증거”(EN, 75)라는 콰인의 핵심 논제는 그만큼 초점을 잃게 된다.
셋째, 콰인에게 ‘증거’가 약식으로 사용된 용어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극작용 또는 신경유입은 ‘증거’가 될 수 없다. 신경유입은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도, 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추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데이빗슨의 기준에 의하면, 진술과 그 진술의 증거 사이의 관계가 논리적 관계여야 하기 때문에, 명제적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한 신경유입은 하나의 진술 또는 믿음, 그 믿음을 표현하는 문장의 증거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