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철학김명석 2001, 브렌타노 퍼즐과 현대철학

브렌타노 퍼즐과 현대철학 

대동철학 14: 1-27, 대동철학회 2001



간추림

이 글의 목적은 지향대상과 관련된 수수께끼 이른바 브렌타노 퍼즐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현대철학을 주도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기원은 브렌타노 퍼즐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이것은 현대철학의 양대조류가 공동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이 점은 두 조류 중 하나에만 투신하는 철학자들에 의해 상당 부분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영미철학과 대륙철학의 대화가 점증하고 있는 것이 뚜렷이 목격되는데, 두 철학이 공동의 문제로부터 유래했다는 점을 회고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나는 먼저 브렌타노 퍼즐과 이와 연관된 개념사를 개괄한 뒤, 프레게, 트바르돕스키, 마이농, 훗설이 이 퍼즐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한 핵심개념들을 분석하였다. 트바르돕스키의 내용 개념은 마이농과 훗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무엇보다 그는 폴란드 분석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훗설은 자신의 시도가 심리주의에 오염되어 있다는 프레게의 비판에 직면하여 초월현상학을 창안하기에 이른다. 한편 러셀은 마이농의 해법을 수용했다가 그 한계를 발견하고 그 대안으로서 기술이론을 개발했다. 현대분석철학은 내용을 결정하는 인자를 찾는 데 집중하였으며, 그 방법론적 노선들은 주로 러셀의 의미론적 데타르트주의와 프레게의 의미-지시 이원론 사이의 반목․절충․조화에 의해 특징지워졌다. 크립키와 퍼트넘에 의하면, 내용의 결정인자는 주체 내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도 있으며, 이 외부인자로 인해 내용은 사회성을 가지게 된다. 데이빗슨은 이 외부주의적 혁명에 일찍부터 동참하면서, 보다 철저한 외부주의, 이름하여 삼각작용의 외부주의를 제안했다.


1. 들어가는 말: 브렌타노 퍼즐

F. Brentano(1837-1917)는 <경험적 입장에서 본 심리학>(1874)에서 르네상스 시기와 근세를 거치면서 점차 망각되었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지향(intentio) 개념을 다시금 부활시킨다. 그는 심리학이 영혼에 관한 학문이 아니라, 심적 현상에 관한 학문이라고 주장하면, 지향성(intentionality)이 오직 심적 현상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 지표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물리적 현상도 [이와] 유사한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심적 현상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정의할 수 있다: 심적 현상은 그 자신 안에 하나의 대상을 지향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그런 현상이다(Brentano 1874, 89).

봄 안에서 어떤 것이 보여지고, 판단함 속에서 어떤 것이 수용되거나 거부되며, 희망함 속에서 어떤 것이 희망된다(같은책, 88). 마음현상은 그 안에 대상을 지향적으로 내포하는 현상이라는 그의 정의는 하나의 퍼즐을 야기한다.

마음은 일단 가동되기만 하면, 언제나 사고대상에 닿으려고 그곳을 향해 뻗어나가는 경향이 있는데, 경향을 지향성이라 한다. 지향성 개념은 현대 심리철학의 가장 중요한 화두다. R. Chisholm(1916-99)은 환원주의나 행동주의가 틀렸음을 보여주기 위해 심리현상의 지향성을 강조했다(Chisholm 1957, ch. 11). 반면에 W. V. Quine(1908-2000)은, 우리가 환원적 물리주의를 가정할 경우, 지향성의 환원불가능성이 오히려 지향성의 무근거성과 무익함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지향적 어법의 환원불가능성에 대한 브렌타노 논제는 번역불확정성 논제와 일치한다. 우리는 브렌타노 논제를 지향어법의 필수불가결성과 자율적 지향학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고, 아니면 지향어법의 근거 없음과 지향학문의 공허함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나의 태도는, 브렌타노의 태도와 달리, 둘째 것이다(Quine 1960, 221).

한편 D. Davidson(1917-)의 무법칙적 일원론의 근본의도는 마음의 지향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안된 심적인 것의 시금석과 [관련]하여, 심적인 것의 변별적 특징은 그것이 사적이거나 주관적 또는 비물질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브렌타노가 지향성이라 불렀던 것을 드러낸다는 것이다”(Davidson 1970, 211). 그리고 J. Fodor(1935-)와 F. Dretske의 인지과학은 지향성을 자연화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지향성을 심리현상의 지표로서 받아들이느냐 마느먀의 문제에 앞서, 지향성 개념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다.

생각이 날 때 마음이 지향하는 대상을 “지향대상”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렇다면 마음은 지향대상과 정확히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화살과 과녁의 경우처럼, 두 항목이 진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둘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원희가 갑현을 바라볼 경우, “바라봄”은 두 존재자 원희와 갑현의 관계다. 마찬가지로 만일 마음이 지향대상을 향하는 것이, 마음과 지향대상 양자가 어떤 실질적 관계를 맺는 것이라면, 두 항목을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마음이 지향대상을 바라볼 경우, 마음과 지향대상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내가 선녀를 사모할 경우, 마음과 선녀의 관계는 무엇이며, 이때 선녀는 존재해야 하는가? 만일 지향대상이 존재해야 한다면, 그것은 실제 일상사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지향성이 가지는 이러한 문제를 브렌타노 퍼즐이라 하자. 브렌타노는 여생 동안 지향성의 이 퍼즐을 풀기 위해 고심했다. 그는 G. Leibniz(1646-1716)를 빌려와서 이를 해결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B. Russell(1872-1970)이 그의 이 시도를 정교화했다.

브렌타노 퍼즐은 마음과 지향대상 사이의 관계가 여타의 다른 관계들과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타 여왕과 결혼하고 싶었다. 그는 그녀와 결혼했다. 이오카스타 여왕은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가 이오카스타와 결혼하고 싶어할 경우, 오이디푸스의 마음과 이오카스타 사이의 관계는 그의 마음과 그의 어머니 사이의 관계와 다르다. 실제 사물로서 이오카스타 여왕과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는 동일한 존재이지만, 지향대상으로 이오카스타 여왕과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는 다른 존재이다.

브렌타노 퍼즐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은 두 진영에서 이루어졌다. K. Twardowski(1866-1938), A. Meinong(1853-1920), E. Husserl(1859-1938)과 같은 브렌타노의 제자들이 그 한 진영을 이루었고, G. Frege(1848-1925)가 다른 진영을 형성했는데, 한 진영은 현상학을, 다른 진영은 분석철학을 낳았다. 그러나 두 진영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다. 두 진영은 공히 B. Bolzano(1781-1848)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프레게는 L. Wittgenstein(1889-1951), 러셀, R. Carnap(1891-1970) 등과 같은 초기 분석철학자들뿐만 아니라, 훗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글의 목적은 브렌타노 퍼즐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일목요연하게 개괄함으로써, 그 시도들이 현대철학의 밑그림을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먼저 제2장에서는, 브렌타노 퍼즐을 해결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지향 개념과 명제 개념의 역사를 정리하였다. 제3장은 프레게의 해결책을, 제4장은 브렌타노 학파의 해결책을 해설하였다. 그리고 제5장은 현대 분석철학 진영에서 언어․심리철학적 논의들이 프레게와 브렌타노 학파의 레이아웃 내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데 할애했다. 주도적인 분석철학자들은 지향대상 또는 사고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관계하는 것이 어떻게 결정되는지를 해명하려고 노력했다.


6. 나오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브렌타노 퍼즐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분석철학과 현상학을 상당 부분 이끌어왔음을 보았다. 특히 언어 및 심리철학의 현대적 논의들은 지향내용 내지 사고내용을 구성․결정하는 요인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 이와 함께 비교적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내부주의로부터 외부주의로 전환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브렌타노 퍼즐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먼저 마음 앞에 어떤 것이 나타나야 한다는 발상에 그 원인이 있다. 일반적으로, 마음이 보는, 마음 안으로 들어와, 마음 앞에 놓인 마음대상은 세계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정보를 전송해 준다고 가정된다. 일체의 심리적 사건은 마음대상이 마음과 어떻게 관련을 맺느냐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이 발상과 가정은 인식론뿐만 아니라, 심리학이라 불리는 심리현상 전반에 대한 그림을 특징짓는다.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 생각하며 사는 것, 그 생각을 표현하며 사는 것이 사람 삶이라면, 마음의 작동방식에 관한, 생각의 본성에 관한 이 기본적 전제들은 사람 삶에 대한 통합적 통찰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데이빗슨은 「주관적인 것의 신화」(1988)에서 마음과 마음대상의 관계를 다루는 전통적 논의들이 이제 혁명적 변화를 겪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외부주의의 함축은 다음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생각의 소유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형성하고, 품고 있는 그 생각들은,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세계 속에,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세계 속에 개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심적 상태들에 관한 우리의 생각들조차 똑같은 개념적 공간을 점유하며, 똑같은 공공적 지도 위에 위치하고 있다(Davidson 1991b, 174).

생각이 일어날 때, 아무 것도 마음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만일 마음이 바라보는 내적 대상이 없다면, 오직 바깥 사물만이 마음 상태를 규정하는가? 전혀 아니다. 세계 속에서 넓게 발생되는 사고내용을 정체확인하고, 하나의 사고를 심적 사건으로 올바르게 기술하고, 의미 있게 해석하는 것은 진리개념을 가진 존재들의 몫이다. 오히려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은 세계 전체다. 왜냐하면 내 생각의 집은 내 머리가 아니라, 세계와 나 사이, 타인과 나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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