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내용과 프레게-데이빗슨 방법론
철학논총 27(1): 25-46, 새한철학회 2002
간추림
사람은 사고와 언어를 통해서 세계에 반응하고 적응하는데, 사고나 언어 속에 담긴 것을 내용이라 한다. 비록 사람과 세계 중간에 내용을 도입하는 것은 수많은 존재론적․인식론적 문제를 양산하였지만, 내용 소유는 인간성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현대철학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사고내용과 세계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압도적인 방법론은 당연 물리주의적 표상주의이다. 먼저 물리주의는 사고내용과 사물세계가 전혀 다른 재료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카르트식 이원론의 적절한 대안으로 인정된다. 한편 표상주의는 바깥 사정을 표상하는 내부적 신경상태를 도입함으로써 인간 사고와 언어 및 행위를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이 글의 목적은 물리주의적 표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프레게-데이빗슨의 방법론을 해설하고 그 의의를 전망하는 것이다.
관념주의자나 물리주의자들은 사고와 언어의 본성을 해명하기에 앞서,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탐구를 먼저 수행한다. 그러나 프레게-데이빗슨 방법론은 합당한 의미이론을 개발한 후,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에 접근해야 하며, 세계의 거동에 관한 물리학적 설명보다 구성적 내용이론이 인간 본성 해명에 우선권을 갖는다고 전제한다. 존재론이나 지시론보다 의미론을 우선시하는 것은, 지시 개념이 아니라 진리 개념을 원초적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내용 또는 의미의 원천은 단어와 사물의 지시관계가 아니라, 참된 문장들의 맥락이다. 그래서 우리의 세계 대면은 인과적 충격으로 파악․상정되는 지시관계가 아니라, 선파악된 원초적 진리 개념을 통해서 확립된다. 이것이 옳다면, 우리가 접촉하는 세계는 진리 개념에 의해 이미 구조화된 세계이며, 진리 평가를 받는 사고내용의 구조 속에 내포된 세계이다. 결과적으로, 사고내용은 세계와 격리․절연된 표상상태와 전혀 동일하지 않다.
1. 들어가는 말
의미의 거울은 세계를 재-현하는 거울이 아니다. 세계는 의미 속에 반영되지 않는다. 오히려, […] 세계가 의미의 거울이다. 세계 가운데서 의미가 구성된다. 오직 세계 가운데서 사물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서 현상된다. 오직 세계의 지평 안에서만 도대체 의미가 가능하다. J. E. Malpas, Donald Davidson and the Mirror of Mean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 7.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굽지만, 저기 바깥에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태양에 대해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태양이 위치하고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해바라기 줄기 세포에 있는 성장촉진 호르몬인 옥신이 태양으로부터 날아온 광자들과 생리학적으로 상호작용했을 뿐이다. 자연세계를 만나는 방식에 있어서 인간과 다른 생물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어나는, 일어날 일을 말과 생각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사고와 언어를 통해서 세계에 반응하고 적응한다. 사고나 언어 속에 담긴 것을 내용(content)이라 하는데, 인간은 내용을 소유함으로써,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인간과 세계의 이러한 관계설정은 수많은 존재론적․인식론적 문제들의 온상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오직 이 온상 속에서만 인간성이 자라날 수 있다.
내용의 차이는 행위의 차이를 낳는다. 예컨대 오늘 갑자기 소나기가 올 것 같다는 사고내용을 가질 때, 내가 어떠한 특별한 감각자극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친구의 온화한 말에 담긴 절교 내용은, 그 내용이 나에게 아무런 물리적․역학적 영향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슴을 뼈저리게 아프게 한다. 심지어 나를 죽게 할 수도 있다. 내용을 소유한다는 것, 또는 “지향”, “의도”, “이유”를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용과 세계의 관계는 무엇이고, 사고나 언어는 어떻게 세계와 연결되는가?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이 문제들에 대한 범례적 답안을 제시해 주었고, 상당히 많은 이론들이 이들을 따르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지향실재론”(intentional realism)이라 부를 수 있는 입장의 표준적 모델이다. 지향실재론은 내용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내용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과 상관없이, 일단 내용 또는 사고, 보다 일반적으로, 명제태도의 실재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지향실재론의 일종이다. 지향실재론의 주류는 “표상주의”인데, 데카르트 관념론은 이 입장의 모범으로 흔히 간주된다. 표상주의는 세계와 아무런 관계설정 없이도 독자적으로 기술되거나 규정될 수 있는 어떤 상태들(언어상태나 사고상태)이 존재하며, 이 상태의 속성에 의거하여 내용의 소유가 정의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언어는 사고의 흔적이며, 사고는 오직 사유하는 실체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언어 및 사고는 연장된 실체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세계와 언어, 세계와 사고는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리하여 세계 전체가 갑자기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아의 사고내용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존립할 수 있다!
데카르트 이원론을 비판하는 것은 후대 철학자들의 관행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철학적으로 합당한 대안이 제시된 것은 아니다.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흔히 인정되는 유물론 또는 물리주의는, 그 압도적인 유행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본성을 만족스럽게 해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사고철학의 주류는,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사고현상을 세계현상과 분리된 것으로 취급한다. 즉 한편에 세계현상이 있고, 다른 편에 그것을 표상하는 사고현상 또는 언어현상이 있으며, 두 현상은 상대편의 사정과 무관하게 기술되거나 특징지워질 수 있다고 본다. 표상되는 세계와 표상하는 마음이, 물리주의의 주장처럼 동일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물리주의적 표상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현대 사고철학과 언어철학 및 심리철학의 핵심과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과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하고, 이것이 표상주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해설하고자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프레게에 의해 그 단초가 마련되었고, 데이빗슨에 의해 체계적으로 논증되었는데, 이것은 “반표상주의적 외부주의”라 명명할 수 있는 입장이다. 이 프레게-데이비슨적 대안을 해명하고 그 함축을 음미하기 위해, 본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차례로 다룰 것이다. 먼저 제2절에서 사고내용의 개념사와 내용이론의 지형도를 개괄했고, 제3절에서 사고내용을 자연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열거하였다. 제4절은 물리주의․표상주의․내부주의에 대안을 마련해준 프레게-데이빗슨 방법론을 소개한 후, 이것의 주요 함축을 전개하는 데 할애했다. 결론에서는 외부주의 및 반표상주의의 결과를 음미하는 것으로 전체 글을 마무리지었다.
5. 나오는 말
무엇이 마음 앞에 현전하는가? 표상주의자에게 그것은 표상이다. 흄은 오직 인상과 관념만이 마음 앞에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아무 것도 결코 진정으로 마음과 함께 현전되지 않고, 오직 마음의 지각작용이나 인상, 관념만이 현전한다는 것과, 그리고 외부 대상은 단지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지각들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것은 철학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게다가 그 자체로 매우 명백하다…. 미워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보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지각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현대 물리주의자들은 근세적 표상을 자연화시켜 감각자료(러셀), 신경기호(포더), 신경유입(콰인) 등으로 달리 부른다. 관념이 인식의 매개물이듯, 감각자료나 신경유입 또한 인식의 매개물이다. 이러한 표상적 매개물을 도입하는 이유는 (절대적 또는 상대적) 확실성의 추구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과는 정반대이다. 세계(객관성)와 주체(주관성)는 소멸되었고,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반표상주의적 외부주의가 옳다면, 사고내용은 오직 마음만이 직접 면식할 수 있는 표상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마음 즉 이유공간은 세계의 한 측면, 의미론적으로 파악된 세계의 지향구조일 뿐이다. 마음은 해석자의 관점에서 상정된 해석학적 구성물이며,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은 해석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세계이다. 세계-내-존재 즉 해석자가 어떤 자세로 세계를 보느냐에 따라, 하나의 동일한 자연세계가 해석학적 세계(지향세계)로, 또는 물리학적 세계(대상세계)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마음의 힘은, 다름 아니라,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이 마음의 힘은 육체의 물리적 구성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분명 이 세계 속의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에 수반하겠지만, 이것은 한 사람의 심적 사건이 그 육체의 물리적 사건에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외부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사람의 육체 내부에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들은 그 사람의 사고내용을 결정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이 인정했듯이, “우리는…사람들이 모든 유관한 물리적 대목들에서 동일하면서 심리적으로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지장이 없다. 이것은 사실상 무법칙적 일원론이 입장이다.” 그리하여,
주관상태들은 두뇌나 신경체계의 상태에 수반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동일한 물리상태에 있으면서 여전히 다른 심리상태에 있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심적 상태가 물리적 상태에 수반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리상태들이 차이가 난다면, 어딘가에 물리적 차이도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리적 차이는 사람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Davidson, “What is Present to the Mind?
“다른 곳”은 물론 세계 어딘가이다. 심적 차이를 야기하는 물리적 차이는 육체 속에 있지 않고, 바깥 어딘가에 있다. 마음 차이는 세계 차이이며, 마음이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마음은 세계를 바꿀 수도 있다. 세계를 다르게 보는 힘은 세계를 달라지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물리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사람은 언제나 이 물리세계 속에, 시공간적 위치를 가지고, 물리세계의 인과적 폐쇄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외부주의가 옳다면, 사람 생각은 피부 안쪽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전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생각의 출현은 상호주관적 진리 개념의 선파악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더구나 타자와 접촉 역사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다. 파블로프의 개는 자기가 종소리에 반응하고 있는지, 귀청의 떨림, 아니면 두뇌 근처 신경 격발에 반응하고 있는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에 대한 너, 너에 대한 나를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는 세계를 보지 못한다.
만일 제 홀로만 있는 단일 피조물을 생각한다면, 그의 반응들은, 제 아무리 복잡하다 할지라도, 그가 말하자면 피부 위가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사건에 반응하고 있다거나, 그런 사건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유아론자의 세계는 그 어떠한 크기도 가질 수 있다. 말하자면, 유아론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아무런 크기도 가지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Davidson, “The Second Person”
타자를 해석할 수 없는 존재는 세계가 아니라, 다만 광선과 입자 및 파동들로 가득 찬 무질서한 먼지더미를 “볼” 뿐이다. 세계-내-해석자(나)는 세계-내-타자(너)를 통해서만 전체 세계를 볼 수 있다. 사고내용은 나-너-세계의 삼각작용의 소산이며, 지향세계는 나-너-세계 삼위일체의 세계이다. 생각하는 사건들의 총체로서 마음은 육체의 부분과 동일시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은 세계 전체에 퍼져 있다. 육체는 피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지만, 마음은 피부의 한계를 넘어선다. 생각의 집은 머리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와 나 사이, 타인과 나 사이에 있다.
사고내용과 프레게-데이빗슨 방법론
철학논총 27(1): 25-46, 새한철학회 2002
간추림
사람은 사고와 언어를 통해서 세계에 반응하고 적응하는데, 사고나 언어 속에 담긴 것을 내용이라 한다. 비록 사람과 세계 중간에 내용을 도입하는 것은 수많은 존재론적․인식론적 문제를 양산하였지만, 내용 소유는 인간성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현대철학의 핵심 문제 중 하나는 사고내용과 세계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압도적인 방법론은 당연 물리주의적 표상주의이다. 먼저 물리주의는 사고내용과 사물세계가 전혀 다른 재료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카르트식 이원론의 적절한 대안으로 인정된다. 한편 표상주의는 바깥 사정을 표상하는 내부적 신경상태를 도입함으로써 인간 사고와 언어 및 행위를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이 글의 목적은 물리주의적 표상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프레게-데이빗슨의 방법론을 해설하고 그 의의를 전망하는 것이다.
관념주의자나 물리주의자들은 사고와 언어의 본성을 해명하기에 앞서,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형이상학적 탐구를 먼저 수행한다. 그러나 프레게-데이빗슨 방법론은 합당한 의미이론을 개발한 후,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에 접근해야 하며, 세계의 거동에 관한 물리학적 설명보다 구성적 내용이론이 인간 본성 해명에 우선권을 갖는다고 전제한다. 존재론이나 지시론보다 의미론을 우선시하는 것은, 지시 개념이 아니라 진리 개념을 원초적 개념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내용 또는 의미의 원천은 단어와 사물의 지시관계가 아니라, 참된 문장들의 맥락이다. 그래서 우리의 세계 대면은 인과적 충격으로 파악․상정되는 지시관계가 아니라, 선파악된 원초적 진리 개념을 통해서 확립된다. 이것이 옳다면, 우리가 접촉하는 세계는 진리 개념에 의해 이미 구조화된 세계이며, 진리 평가를 받는 사고내용의 구조 속에 내포된 세계이다. 결과적으로, 사고내용은 세계와 격리․절연된 표상상태와 전혀 동일하지 않다.
1. 들어가는 말
의미의 거울은 세계를 재-현하는 거울이 아니다. 세계는 의미 속에 반영되지 않는다. 오히려, […] 세계가 의미의 거울이다. 세계 가운데서 의미가 구성된다. 오직 세계 가운데서 사물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서 현상된다. 오직 세계의 지평 안에서만 도대체 의미가 가능하다. J. E. Malpas, Donald Davidson and the Mirror of Mean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 p. 7.
해바라기는 태양을 향해 굽지만, 저기 바깥에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태양에 대해 무엇인가를 표현하지 않는다. 해바라기는 태양이 위치하고 있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해바라기 줄기 세포에 있는 성장촉진 호르몬인 옥신이 태양으로부터 날아온 광자들과 생리학적으로 상호작용했을 뿐이다. 자연세계를 만나는 방식에 있어서 인간과 다른 생물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어나는, 일어날 일을 말과 생각을 통해 표현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사고와 언어를 통해서 세계에 반응하고 적응한다. 사고나 언어 속에 담긴 것을 내용(content)이라 하는데, 인간은 내용을 소유함으로써, 세계와 상호작용한다. 인간과 세계의 이러한 관계설정은 수많은 존재론적․인식론적 문제들의 온상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문제가 많다 하더라도, 오직 이 온상 속에서만 인간성이 자라날 수 있다.
내용의 차이는 행위의 차이를 낳는다. 예컨대 오늘 갑자기 소나기가 올 것 같다는 사고내용을 가질 때, 내가 어떠한 특별한 감각자극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선다. 친구의 온화한 말에 담긴 절교 내용은, 그 내용이 나에게 아무런 물리적․역학적 영향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가슴을 뼈저리게 아프게 한다. 심지어 나를 죽게 할 수도 있다. 내용을 소유한다는 것, 또는 “지향”, “의도”, “이유”를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용과 세계의 관계는 무엇이고, 사고나 언어는 어떻게 세계와 연결되는가?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이 문제들에 대한 범례적 답안을 제시해 주었고, 상당히 많은 이론들이 이들을 따르고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지향실재론”(intentional realism)이라 부를 수 있는 입장의 표준적 모델이다. 지향실재론은 내용을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내용의 본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과 상관없이, 일단 내용 또는 사고, 보다 일반적으로, 명제태도의 실재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지향실재론의 일종이다. 지향실재론의 주류는 “표상주의”인데, 데카르트 관념론은 이 입장의 모범으로 흔히 간주된다. 표상주의는 세계와 아무런 관계설정 없이도 독자적으로 기술되거나 규정될 수 있는 어떤 상태들(언어상태나 사고상태)이 존재하며, 이 상태의 속성에 의거하여 내용의 소유가 정의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언어는 사고의 흔적이며, 사고는 오직 사유하는 실체 속에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언어 및 사고는 연장된 실체 속에 존재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세계와 언어, 세계와 사고는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리하여 세계 전체가 갑자기 사라진다 하더라도 자아의 사고내용은 전혀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존립할 수 있다!
데카르트 이원론을 비판하는 것은 후대 철학자들의 관행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매번 철학적으로 합당한 대안이 제시된 것은 아니다.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흔히 인정되는 유물론 또는 물리주의는, 그 압도적인 유행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본성을 만족스럽게 해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사고철학의 주류는, 데카르트가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사고현상을 세계현상과 분리된 것으로 취급한다. 즉 한편에 세계현상이 있고, 다른 편에 그것을 표상하는 사고현상 또는 언어현상이 있으며, 두 현상은 상대편의 사정과 무관하게 기술되거나 특징지워질 수 있다고 본다. 표상되는 세계와 표상하는 마음이, 물리주의의 주장처럼 동일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물리주의적 표상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현대 사고철학과 언어철학 및 심리철학의 핵심과제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과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소개하고, 이것이 표상주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해설하고자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프레게에 의해 그 단초가 마련되었고, 데이빗슨에 의해 체계적으로 논증되었는데, 이것은 “반표상주의적 외부주의”라 명명할 수 있는 입장이다. 이 프레게-데이비슨적 대안을 해명하고 그 함축을 음미하기 위해, 본론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차례로 다룰 것이다. 먼저 제2절에서 사고내용의 개념사와 내용이론의 지형도를 개괄했고, 제3절에서 사고내용을 자연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열거하였다. 제4절은 물리주의․표상주의․내부주의에 대안을 마련해준 프레게-데이빗슨 방법론을 소개한 후, 이것의 주요 함축을 전개하는 데 할애했다. 결론에서는 외부주의 및 반표상주의의 결과를 음미하는 것으로 전체 글을 마무리지었다.
5. 나오는 말
무엇이 마음 앞에 현전하는가? 표상주의자에게 그것은 표상이다. 흄은 오직 인상과 관념만이 마음 앞에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아무 것도 결코 진정으로 마음과 함께 현전되지 않고, 오직 마음의 지각작용이나 인상, 관념만이 현전한다는 것과, 그리고 외부 대상은 단지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지각들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다는 것은 철학자들에 의해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게다가 그 자체로 매우 명백하다…. 미워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느끼고, 보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지각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현대 물리주의자들은 근세적 표상을 자연화시켜 감각자료(러셀), 신경기호(포더), 신경유입(콰인) 등으로 달리 부른다. 관념이 인식의 매개물이듯, 감각자료나 신경유입 또한 인식의 매개물이다. 이러한 표상적 매개물을 도입하는 이유는 (절대적 또는 상대적) 확실성의 추구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과는 정반대이다. 세계(객관성)와 주체(주관성)는 소멸되었고,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반표상주의적 외부주의가 옳다면, 사고내용은 오직 마음만이 직접 면식할 수 있는 표상상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마음 즉 이유공간은 세계의 한 측면, 의미론적으로 파악된 세계의 지향구조일 뿐이다. 마음은 해석자의 관점에서 상정된 해석학적 구성물이며, 진정으로 실재하는 것은 해석자를 자기 속에 포함하고 있는 세계이다. 세계-내-존재 즉 해석자가 어떤 자세로 세계를 보느냐에 따라, 하나의 동일한 자연세계가 해석학적 세계(지향세계)로, 또는 물리학적 세계(대상세계)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마음의 힘은, 다름 아니라, 세계를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이 마음의 힘은 육체의 물리적 구성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분명 이 세계 속의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에 수반하겠지만, 이것은 한 사람의 심적 사건이 그 육체의 물리적 사건에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외부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한 사람의 육체 내부에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들은 그 사람의 사고내용을 결정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이 인정했듯이, “우리는…사람들이 모든 유관한 물리적 대목들에서 동일하면서 심리적으로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 지장이 없다. 이것은 사실상 무법칙적 일원론이 입장이다.” 그리하여,
주관상태들은 두뇌나 신경체계의 상태에 수반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동일한 물리상태에 있으면서 여전히 다른 심리상태에 있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심적 상태가 물리적 상태에 수반되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심리상태들이 차이가 난다면, 어딘가에 물리적 차이도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리적 차이는 사람 속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Davidson, “What is Present to the Mind?
“다른 곳”은 물론 세계 어딘가이다. 심적 차이를 야기하는 물리적 차이는 육체 속에 있지 않고, 바깥 어딘가에 있다. 마음 차이는 세계 차이이며, 마음이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마음은 세계를 바꿀 수도 있다. 세계를 다르게 보는 힘은 세계를 달라지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물리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사람은 언제나 이 물리세계 속에, 시공간적 위치를 가지고, 물리세계의 인과적 폐쇄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러나 외부주의가 옳다면, 사람 생각은 피부 안쪽 물리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전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생각의 출현은 상호주관적 진리 개념의 선파악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것은 더구나 타자와 접촉 역사가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다. 파블로프의 개는 자기가 종소리에 반응하고 있는지, 귀청의 떨림, 아니면 두뇌 근처 신경 격발에 반응하고 있는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에 대한 너, 너에 대한 나를 파악하지 못하는 존재는 세계를 보지 못한다.
만일 제 홀로만 있는 단일 피조물을 생각한다면, 그의 반응들은, 제 아무리 복잡하다 할지라도, 그가 말하자면 피부 위가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사건에 반응하고 있다거나, 그런 사건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다. 유아론자의 세계는 그 어떠한 크기도 가질 수 있다. 말하자면, 유아론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아무런 크기도 가지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의 세계가 아니다. Davidson, “The Second Person”
타자를 해석할 수 없는 존재는 세계가 아니라, 다만 광선과 입자 및 파동들로 가득 찬 무질서한 먼지더미를 “볼” 뿐이다. 세계-내-해석자(나)는 세계-내-타자(너)를 통해서만 전체 세계를 볼 수 있다. 사고내용은 나-너-세계의 삼각작용의 소산이며, 지향세계는 나-너-세계 삼위일체의 세계이다. 생각하는 사건들의 총체로서 마음은 육체의 부분과 동일시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은 세계 전체에 퍼져 있다. 육체는 피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지만, 마음은 피부의 한계를 넘어선다. 생각의 집은 머리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와 나 사이, 타인과 나 사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