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인의 평행론
철학적분석 5: 91-111, 분석철학회 2001
간추림
주체간의 정신적 교류나 프레게식 의미의 매개를 전제하지 않은 채,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해명하는 것은 모든 자연주의 언어철학자들의 핵심과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예정조화에 의한 평행론을 도입함으로써, 초자연적 힘의 수시적 협력 없이, 주체들 사이의 연합과 의사소통을 설명했던 것처럼, 콰인도 이와 유사한 평행론을 도입함으로써 자기 기획을 완수하려 한다. 그러나 전자의 평행론은 지성적 창조주의 초시간적 완전성에 근거하고 있다면, 후자의 평행론은 역학적 자연의 내재적 자기조직화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콰인의 평행론을 해설하고, 이를 데이빗슨적 노선에서 비판할 것이다. 콰인은 비언어적 신경유입에서 어떻게 언어적 의미가 생성될 수 있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먼저 외부세계의 충격과 인지적 언어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관찰문장을 도입한 후, 이 관찰문장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적 의미를 신경유입에 결부시켜 정의한다. 그 다음 그는 관찰문장 의미의 상호주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각 주체들이 선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신경유입들을 분류하는 지각유사성 표준들의 예정조화를 요청한다. 그러나 콰인의 평행론은 비록 그가 물리주의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흄과 카르납의 인식론이 그랬던 것처럼, 데카르트적 주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유아론적이다.
1. 들어가는 말
평행론(parallelism)이란 심리적 사건 계열들이 물리적 사건 계열과 조화를 이루며 평행하게 전개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심적 사건들은 다른 심적 사건들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고, 물리적 사건들은 다른 물리적 사건들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지만,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은 서로 독립적이며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룰 주제는 이와 같은 심물 평행론이 아니라, 콰인이 의미의 상호주관적 공유를 해명하기 위해 도입한 의미론적 평행론이다.
라이프니츠는 스콜라식 유출이론처럼 외부로부터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영향을 요청하거나, 기회원인론(occasionalism, 수시론隨時論)처럼 초자연적 힘의 수시적 협력을 끄집어들이지 않으면서, 주체들 사이의 연합과 의사소통을 설명하기를 원했다. 콰인의 “평행론”(Q 1999, 75; Q 2000, 2)은 라이프니츠의 평행론과 비슷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콰인은 두 주체 사이의 정신적 교류 없이, 그리고 그 존재가 의심스러운 프레게식 의미의 매개 없이,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이 어떻게 가능한지 해명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상호주관성은 다만 각 주체들이 세계와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할 것과, 그 작용의 오랜 역사가 이미 종족의 유전자 속에 온축되어 있을 것을 요구할 뿐이다. 이 온축은 평행론이 요구하는 모종의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 Q 1995a, 21)를 제공해 준다.
콰인의 평행론은 프레게식 플라톤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프레게는 의사소통의 가능성과 학문의 객관성을 인정한다면 필경 의미의 객관성도 인정해야 한다면서, 의미가 주체의 피부 안쪽 생리상태도 피부 바깥쪽 물리상태도 아니며, 오히려 제3의 독자적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객관적 품목이라고 주장했다(Frege 1918, 337). 그러나 물리주의(자연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의미가 모종의 품목인 한, 그것은 물리적 품목이어야 하고, 그 속성은 물리적 용어들의 조합으로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파악 역시 자연주의 인식론에 의거하여 해명되어야 한다. 자연주의자 콰인은 의미의 상호주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객관적 품목 의미를 도입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비의미론적‧물리적 용어들을 통해 정의하려고 했다.
콰인은 비언어적 신경유입(神經流入; neural intake)에서 어떻게 언어적 의미가 생성될 수 있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먼저 신경유입에서 언어로 가는 중간다리로서 관찰문장을 도입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 관찰문장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적 의미를 명시적으로 정의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관찰문장의 의미는 곧 그것의 자극의미(stimulus-meaning)이다. 여기서 한 주체에게 어떤 한 문장의 자극의미란 현재의 신경유입에 응답하여 그 문장에 동의하거나 이의하는 그 주체의 성향을 말한다. 그리고 한 주체가 두 신경유입에 대해 유사하게 반응하곤 하는 것은 그 주체의 선천적 지각유사성 표준(standards of perceptual similarity) 때문인데, 콰인은 두 주체가 가진 지각유사성 표준이 잘 맞추어진 두 시계처럼 조화롭게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예정조화 때문에 두 주체의 지각유사성 표준은 평행하게 작동하며, 결과적으로 구두적 행위 및 인지작용에 상호주관성이 성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콰인의 평행론을 해설하고, 이를 평가하는 것이다. 먼저 제2절에서는 의미를 존재론적 품목으로 보지 않는 콰인이 어떤 식으로 관찰문장의 의미를 정의하는지 정리될 것이다. 그리고 제3절에서 콰인이 관찰문장에 상호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요청한 예정조화를 다룬 후, 제4절에서 데이빗슨적 노선에서 콰인의 평행론을 비판할 것이다. 요컨대, 콰인의 평행론은 본질적으로 데카르트적 주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D 1991a, 194), 언어 현상에서 타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4. 나오는 말
콰인이 그려준, 언어가 출현하기 전의 인식론적 세계는 황량한 사막(Q 1951, 4), 또는 적막한 우주 공간, 아니면 망망한 대해와 같다. 그 위에, 그 속에 동일한 유전구조를 지닌 사람들이 각자 따로따로 서 있고, 유랑하고, 표류한다. 그리고 이름 없는 모래와 가스와 물결이 그들의 피부에 일제히 휘몰아친다. 그가 말하고 사고하기 위해 타자가 초월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콰인에게 의미의 상호주관성 및 언어의 사회성은 자연의 일률성에 놓여 있다. 그 일률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해 일률적으로 반응하도록 강제한다. 이론이 내가 무엇인가를 믿으려는 결심에 기초한 것이 아니듯(Føllesdal 1988, x), 언어도 내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의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세계에 관한 나의 표현 즉 나의 관찰문장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나를 강제하는 자연으로 충분하다. 각 개인은 환경과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의사소통할 수 있었고, 자연세계에 맞는 일견 객관적 생각을 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를 원초적으로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은 본질적으로 “고독한”(Lewis & Holdcroft 1997, 537) 주체들이다. 그들은 실질적 의도를 가지고 의사소통하지 않고, 다만 평행하게 자연적으로 자연에 반응할 뿐이다. 그들은 자기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며 어쩌면 전달할 마음도 없는지 모른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으로부터 콰인의 자연주의 경험론까지 인식론의 주류는 주관적인 것(코기토, 데이터, 표상, 신경유입)을 객관적 인식(세계지각)과 상호주관적 인식(타자해석)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이런 유형의 인식론은 “선형 인식론”(linear epistemology)으로 명명될 수 있는데, 이것은 자기대면으로부터 세계지각을, 세계지각으로부터 타자해석을 이성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도출해낸다. 콰인의 의미이론은 타자해석의 인식론적 부차성을 전제하는 이러한 선형 인식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인식론의 콰익식 자연화는 선형 인식론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콰인은 자기 관심이 “비록 자연화되었지만, 인식론적”(Quine 1992a, 41)이기 때문에 인식의 출발점을 <주체의 신경격발>에서 찾는다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인식론에서도 타자는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유아론적이다.
버클리는 신시각이론(1709)에서 주어진 2차원 시각적 평면 지각으로부터 3차원 입체 세계를 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버클리의 자아는 저기 바깥의 대상이 자아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으며, 자아와 바깥 사물 사이에는 정말이지 아무 거리도 없다. 카르납은 세계의 논리적 구성(1928)에서 2차원 시각적 감각질로부터 3차원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안구의 구면에서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직선을 도입한다. 그러나 각 선분은 어디까지 뻗어나가고,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타자가 없다면, 한 주체가 자기 반응의 원인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흄의 현상론적 주체가, 해바라기처럼, 태양인 양 보이는 것(현상)과 태양(실재)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콰인의 유아론적 주체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기가 종소리에 반응하고 있는지, 귀청의 떨림, 아니면 두뇌 근처 신경 격발에 반응하고 있는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데이빗슨이 주장했듯이, “만일 제 홀로만 있는 단일 피조물을 생각한다면, 그의 반응들은, 제 아무리 복잡하다 할지라도, 그가 말하자면 피부 위가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사건에 반응하고 있다거나, 그런 사건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D 1992, 119). 그런데 만일 주체가 무엇에 관해 말하고 무엇에 관해 생각하는지 말할 수 없다면 그가 도대체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인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주체가 반응하는 “바로 그 원인”이 고정되지 못하는 한, 그의 반응은 아무런 [특정한] 내용(의미)을 지니지 못한다. 사고와 언어의 출현을 위해 타자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가 있기 전에 유전자와 신경유입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먼저 타자가 있어야 한다. 주체가 타자와 공동으로 반응하는 “바로 그 공통 원인”을 감지하고, “그 자극이 공통 공간 내 객관적 위치를 가[질 때]”(D 1989, 198), 비로소 주체의 그 반응이 내용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제이인칭 타자와[의] 상호작용의 역사가 없다면, 주체는 자기 반응이 관계하고 있는 사물(자극)을 객관적 시공간 내에 위치시킬 원초적 앵글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무엇에 관해 생각하고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결코 판단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사적 언어 반론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타자가 없다면, 자기의 오류를 감지할 공적 공간이 출현하지 않는다(D 2000, 63). 참과 거짓, 진상과 허상, 한갓 그렇게 보임과 그러함이 다르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존재는 사고와 언어를 가질 수 없다. 데이빗슨의 표현처럼, “[언어]를 가지기 위해, 세계의 형세들을 식별하고, 상이한 상황들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렁이나 해바라기도 이것을 한다”(D 1991b, 209; 인용자의 변경). 의미는 현상적 유사성 공간이 아니라, 주체가 그 속에서 타자와(with) 사물을 공유하고 있는, 그래서 주체가 이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런 공적 공간에서 출현한다.
콰인의 평행론
철학적분석 5: 91-111, 분석철학회 2001
간추림
주체간의 정신적 교류나 프레게식 의미의 매개를 전제하지 않은 채,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해명하는 것은 모든 자연주의 언어철학자들의 핵심과제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가 예정조화에 의한 평행론을 도입함으로써, 초자연적 힘의 수시적 협력 없이, 주체들 사이의 연합과 의사소통을 설명했던 것처럼, 콰인도 이와 유사한 평행론을 도입함으로써 자기 기획을 완수하려 한다. 그러나 전자의 평행론은 지성적 창조주의 초시간적 완전성에 근거하고 있다면, 후자의 평행론은 역학적 자연의 내재적 자기조직화에 근거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콰인의 평행론을 해설하고, 이를 데이빗슨적 노선에서 비판할 것이다. 콰인은 비언어적 신경유입에서 어떻게 언어적 의미가 생성될 수 있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먼저 외부세계의 충격과 인지적 언어 사이의 인터페이스로서 관찰문장을 도입한 후, 이 관찰문장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적 의미를 신경유입에 결부시켜 정의한다. 그 다음 그는 관찰문장 의미의 상호주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각 주체들이 선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신경유입들을 분류하는 지각유사성 표준들의 예정조화를 요청한다. 그러나 콰인의 평행론은 비록 그가 물리주의를 지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흄과 카르납의 인식론이 그랬던 것처럼, 데카르트적 주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본질적으로 유아론적이다.
1. 들어가는 말
평행론(parallelism)이란 심리적 사건 계열들이 물리적 사건 계열과 조화를 이루며 평행하게 전개된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심적 사건들은 다른 심적 사건들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고, 물리적 사건들은 다른 물리적 사건들과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지만, 심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은 서로 독립적이며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룰 주제는 이와 같은 심물 평행론이 아니라, 콰인이 의미의 상호주관적 공유를 해명하기 위해 도입한 의미론적 평행론이다.
라이프니츠는 스콜라식 유출이론처럼 외부로부터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영향을 요청하거나, 기회원인론(occasionalism, 수시론隨時論)처럼 초자연적 힘의 수시적 협력을 끄집어들이지 않으면서, 주체들 사이의 연합과 의사소통을 설명하기를 원했다. 콰인의 “평행론”(Q 1999, 75; Q 2000, 2)은 라이프니츠의 평행론과 비슷한 의도를 지니고 있다. 콰인은 두 주체 사이의 정신적 교류 없이, 그리고 그 존재가 의심스러운 프레게식 의미의 매개 없이,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이 어떻게 가능한지 해명하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상호주관성은 다만 각 주체들이 세계와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할 것과, 그 작용의 오랜 역사가 이미 종족의 유전자 속에 온축되어 있을 것을 요구할 뿐이다. 이 온축은 평행론이 요구하는 모종의 “예정조화”(preestablished harmony; Q 1995a, 21)를 제공해 준다.
콰인의 평행론은 프레게식 플라톤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프레게는 의사소통의 가능성과 학문의 객관성을 인정한다면 필경 의미의 객관성도 인정해야 한다면서, 의미가 주체의 피부 안쪽 생리상태도 피부 바깥쪽 물리상태도 아니며, 오히려 제3의 독자적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객관적 품목이라고 주장했다(Frege 1918, 337). 그러나 물리주의(자연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의미가 모종의 품목인 한, 그것은 물리적 품목이어야 하고, 그 속성은 물리적 용어들의 조합으로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파악 역시 자연주의 인식론에 의거하여 해명되어야 한다. 자연주의자 콰인은 의미의 상호주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객관적 품목 의미를 도입하지 않고, 다만 그것을 비의미론적‧물리적 용어들을 통해 정의하려고 했다.
콰인은 비언어적 신경유입(神經流入; neural intake)에서 어떻게 언어적 의미가 생성될 수 있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먼저 신경유입에서 언어로 가는 중간다리로서 관찰문장을 도입한다. 그런 다음 그는 이 관찰문장들이 공유하고 있는 경험적 의미를 명시적으로 정의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관찰문장의 의미는 곧 그것의 자극의미(stimulus-meaning)이다. 여기서 한 주체에게 어떤 한 문장의 자극의미란 현재의 신경유입에 응답하여 그 문장에 동의하거나 이의하는 그 주체의 성향을 말한다. 그리고 한 주체가 두 신경유입에 대해 유사하게 반응하곤 하는 것은 그 주체의 선천적 지각유사성 표준(standards of perceptual similarity) 때문인데, 콰인은 두 주체가 가진 지각유사성 표준이 잘 맞추어진 두 시계처럼 조화롭게 작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예정조화 때문에 두 주체의 지각유사성 표준은 평행하게 작동하며, 결과적으로 구두적 행위 및 인지작용에 상호주관성이 성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콰인의 평행론을 해설하고, 이를 평가하는 것이다. 먼저 제2절에서는 의미를 존재론적 품목으로 보지 않는 콰인이 어떤 식으로 관찰문장의 의미를 정의하는지 정리될 것이다. 그리고 제3절에서 콰인이 관찰문장에 상호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 요청한 예정조화를 다룬 후, 제4절에서 데이빗슨적 노선에서 콰인의 평행론을 비판할 것이다. 요컨대, 콰인의 평행론은 본질적으로 데카르트적 주관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D 1991a, 194), 언어 현상에서 타자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4. 나오는 말
콰인이 그려준, 언어가 출현하기 전의 인식론적 세계는 황량한 사막(Q 1951, 4), 또는 적막한 우주 공간, 아니면 망망한 대해와 같다. 그 위에, 그 속에 동일한 유전구조를 지닌 사람들이 각자 따로따로 서 있고, 유랑하고, 표류한다. 그리고 이름 없는 모래와 가스와 물결이 그들의 피부에 일제히 휘몰아친다. 그가 말하고 사고하기 위해 타자가 초월적으로 요구되지 않는다. 콰인에게 의미의 상호주관성 및 언어의 사회성은 자연의 일률성에 놓여 있다. 그 일률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자연에 대해 일률적으로 반응하도록 강제한다. 이론이 내가 무엇인가를 믿으려는 결심에 기초한 것이 아니듯(Føllesdal 1988, x), 언어도 내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의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세계에 관한 나의 표현 즉 나의 관찰문장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나를 강제하는 자연으로 충분하다. 각 개인은 환경과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의사소통할 수 있었고, 자연세계에 맞는 일견 객관적 생각을 산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동체를 원초적으로 공유하고 있지 않으며, 그래서 그들은 본질적으로 “고독한”(Lewis & Holdcroft 1997, 537) 주체들이다. 그들은 실질적 의도를 가지고 의사소통하지 않고, 다만 평행하게 자연적으로 자연에 반응할 뿐이다. 그들은 자기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며 어쩌면 전달할 마음도 없는지 모른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으로부터 콰인의 자연주의 경험론까지 인식론의 주류는 주관적인 것(코기토, 데이터, 표상, 신경유입)을 객관적 인식(세계지각)과 상호주관적 인식(타자해석)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이런 유형의 인식론은 “선형 인식론”(linear epistemology)으로 명명될 수 있는데, 이것은 자기대면으로부터 세계지각을, 세계지각으로부터 타자해석을 이성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도출해낸다. 콰인의 의미이론은 타자해석의 인식론적 부차성을 전제하는 이러한 선형 인식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인식론의 콰익식 자연화는 선형 인식론의 포기를 뜻하지 않는다. 콰인은 자기 관심이 “비록 자연화되었지만, 인식론적”(Quine 1992a, 41)이기 때문에 인식의 출발점을 <주체의 신경격발>에서 찾는다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그의 인식론에서도 타자는 실질적 역할을 하고 있지 않으며, 본질적으로 유아론적이다.
버클리는 신시각이론(1709)에서 주어진 2차원 시각적 평면 지각으로부터 3차원 입체 세계를 구성하려 했다. 그러나 버클리의 자아는 저기 바깥의 대상이 자아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져 있는지 판단할 수 없으며, 자아와 바깥 사물 사이에는 정말이지 아무 거리도 없다. 카르납은 세계의 논리적 구성(1928)에서 2차원 시각적 감각질로부터 3차원 공간을 구성하기 위해 안구의 구면에서 수직으로 뻗어나가는 직선을 도입한다. 그러나 각 선분은 어디까지 뻗어나가고,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타자가 없다면, 한 주체가 자기 반응의 원인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 흄의 현상론적 주체가, 해바라기처럼, 태양인 양 보이는 것(현상)과 태양(실재)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콰인의 유아론적 주체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자기가 종소리에 반응하고 있는지, 귀청의 떨림, 아니면 두뇌 근처 신경 격발에 반응하고 있는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데이빗슨이 주장했듯이, “만일 제 홀로만 있는 단일 피조물을 생각한다면, 그의 반응들은, 제 아무리 복잡하다 할지라도, 그가 말하자면 피부 위가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사건에 반응하고 있다거나, 그런 사건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D 1992, 119). 그런데 만일 주체가 무엇에 관해 말하고 무엇에 관해 생각하는지 말할 수 없다면 그가 도대체 말하고 생각하는 존재인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주체가 반응하는 “바로 그 원인”이 고정되지 못하는 한, 그의 반응은 아무런 [특정한] 내용(의미)을 지니지 못한다. 사고와 언어의 출현을 위해 타자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언어가 있기 전에 유전자와 신경유입이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보다 먼저 타자가 있어야 한다. 주체가 타자와 공동으로 반응하는 “바로 그 공통 원인”을 감지하고, “그 자극이 공통 공간 내 객관적 위치를 가[질 때]”(D 1989, 198), 비로소 주체의 그 반응이 내용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해 제이인칭 타자와[의] 상호작용의 역사가 없다면, 주체는 자기 반응이 관계하고 있는 사물(자극)을 객관적 시공간 내에 위치시킬 원초적 앵글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무엇에 관해 생각하고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결코 판단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사적 언어 반론에서 잘 보여주었듯이, 타자가 없다면, 자기의 오류를 감지할 공적 공간이 출현하지 않는다(D 2000, 63). 참과 거짓, 진상과 허상, 한갓 그렇게 보임과 그러함이 다르다는 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존재는 사고와 언어를 가질 수 없다. 데이빗슨의 표현처럼, “[언어]를 가지기 위해, 세계의 형세들을 식별하고, 상이한 상황들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렁이나 해바라기도 이것을 한다”(D 1991b, 209; 인용자의 변경). 의미는 현상적 유사성 공간이 아니라, 주체가 그 속에서 타자와(with) 사물을 공유하고 있는, 그래서 주체가 이 사실을 감지할 수 있는 그런 공적 공간에서 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