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슨의 인식론 뒤집기
철학연구 81: 25-44, 대한철학회 2002
간추림
데카르트의 합리론으로부터 콰인의 자연주의 경험론까지 인식론의 주류는 주관적인 것(코기토, 데이터, 표상, 신경유입)을 객관적 인식(세계지각)과 상호주관적 인식(타자해석)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이런 유형의 인식론은 “선형 인식론”으로 명명될 수 있는데, 이것은 자기대면으로부터 세계지각을, 세계지각으로부터 타자해석을 이성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도출해낸다. 그리하여 타자 마음은 세계 그림을 토대로, 세계 그림은 자아의 감각장을 토대로 선형적으로 구성된다. 데이빗슨은 이러한 선형 인식론을 공격하고 역전시켰으며, 그 대안으로서 이른바 “삼각 인식론”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개념적으로 기본적인 것은 자아의 자기대면이 아니라 타자의 지향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 해석은 세계지각 및 자기대면과 독립된 인식 유형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은 단계적으로 출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출현한다. 그리하여 사고와 인식은 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타자와 세계의 존재를 동시에 요구한다. 마침내 우리가 얻는 새로운 코기토는 이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너-세계가 존재한다.
I. 들어가는 말
인식의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어떤 것이다. 무엇이 가장 확실하다고 인정되는가? 합리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의 답변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공통적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합리주의자에게 그것은 나의 이성, 나의 확신, 나의 생각, 나의 의심이다. 경험주의자에게 그것은 나의 경험, 나의 자료, 나의 감각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나에게 일어나는 생각(코기토) 또는 나에게 주어진 것(데이타), 즉 내가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에 관한 나의 앎이다. 그렇다면 가장 덜 확실한 인식 형태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의 마음 상태에 관한 앎이다. 그 중간에 세계에 관한 앎이 놓여 있다. 전통 인식론의 패러다임은 내 마음에 주어진 자료(주관적 앎)로부터, 외부세계에 대한 앎(대상에 관한 앎, 객관적 앎)을 경유하여, 마지막으로 타자 마음에 관한 앎(상호주관적 앎)으로 나아가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이 패러다임은 “선형 인식론”(linear epistemology)이라 불릴 수 있겠는데, 제II절에서 몇몇 선형 인식론의 표본들이 예시될 것이다.
이처럼 선형 인식론은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후기분석철학자 데이빗슨 Donald Davidson은, 인식론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오히려 타자에 관한 앎이고, 맨 나중에 주관적 앎이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선형 인식론은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진다. 이 글의 목적은 데이빗슨의 이러한 인식론 뒤집기를 해설하고 향후 인식론을 전망하는 것이다. 선형 인식론은 주관표상으로부터 객관세계를 구성하려 하지만, 타자를 애초부터 배제하는 한,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심연이 놓이게 되고, 결국 그 인식론은 유아주의(이하 유아론)로 함몰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 타자가 요청되는데, 제III절에서는 타자의 인식론적 중요성이 발견되는 과정이 개괄될 것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규칙-따르기 논제는 생각과 말이 필연적으로 타자 존재를 요청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규칙-따르기 인식론은, 크립키의 해석이 보여주었듯이, 회의적 귀결을 갖는다. 인식의 사회성은 규칙-따르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인식은 두 주체의 공허한 대화에 의해 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과 말은 타자뿐만 아니라 세계의 존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은 심리철학과 언어철학 탐구를 통해 하나의 삼각형, “한 사람, 그의 사회, 그리고 공유 환경으로 구성된 삼각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일생 탐구는 “[이] 삼각형을 파악하려는 시도의 역사”로 요약될 수 있다. 주관-상호주관-객관을 삼겹줄로 묶는 그의 새로운 인식론 패러다임은 “삼각형 인식론”(triangular epistemology) 또는 “삼각대 인식론”(tripod epistemology)라 부를 수 있는데, 제IV절에서 이것을 얻는 그의 논증이 해설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 삼각 인식론의 함축과 의의를 전망하는 것으로 전체 글을 마무리지었다. 삼각 인식론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이 인식론이 일인칭 권위를 해명하지 못한다는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삼각 인식론은 자아가 그 누구보다도, 다른 어떤 인식 대상보다도, 자기 마음에 가장 확실히, 가장 쉽게 접근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지면관계상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V. 나오는 말
데이빗슨의 삼각 인식론에 따르면 인식의 기초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것 속에 있다. 그래서 “마음들의 공동체는 인식의 기초이다. 이것은 만물의 척도를 제공한다. 이 척도의 적합성을 의문시하거나, 보다 궁극적 표준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다음과 같이 패러디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너는 존재한다.” 즉 타자의 존재는 자아 사고의 필요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을 더 잘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게을리 할 때, 나는 세계와 점차 단절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삼각 인식론이 인식의 출발점을 상호주관적 앎에서 찾는다는 의미에서, 그 다음 객관적 앎으로, 주관적 앎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기존 선형 인식론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다. 그러나 상호주관적 앎은 제 홀로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식 유형과 함께 일거에 출현한다는 의미에서, 삼각 인식론은 더 이상 선형 인식론이라 불릴 수 없다. 데이빗슨은 기존 인식론을 뒤집었지만 그의 뒤집기는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로티처럼 인식론 전체를 뒤집어엎어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칸트처럼 인식론의 기본 패러다임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놓아 또는 해체하여 그것을 보다 안전하게 세워 놓았다. 뒤집기 후에 다시 세워진 것은 인식 원천에 보다 깊숙이 보다 뾰족하게 박힌 모종의 기둥이 아니라, 깊이 박히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안전히 설 수 있는 삼각대이다. 그러나 이 삼각대(자기대면-타자해석-세계지각)는 “어느 한 다리라도 잃어버리면, 아무 다리도 설 수 없다.” 마침내 우리가 얻게 되는 새로운 코기토는 이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너-세계가 존재한다. 즉 나-너-세계는 사유의 필요조건이다.
삼각 인식론은 매우 중요한 함축을 지닌다. 첫째, 모든 인식은 이미 상당히 객관적이라는 사실이다. “생각의 소유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내용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형성하고 품고 있는 그 생각들은,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세계 속에,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세계 속에 개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심적 상태들에 관한 우리의 생각들조차 똑같은 개념적 공간을 점유하며, 똑같은 공공적 지도 위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 나아가 가치판단 즉 윤리적 판단이나 미학적 판단들도 인식론적으로 적법하며, 때때로 객관적일 수 있다. 이러한 함축은 윤리학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준다.
데이빗슨의 인식론 뒤집기
철학연구 81: 25-44, 대한철학회 2002
간추림
데카르트의 합리론으로부터 콰인의 자연주의 경험론까지 인식론의 주류는 주관적인 것(코기토, 데이터, 표상, 신경유입)을 객관적 인식(세계지각)과 상호주관적 인식(타자해석)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이런 유형의 인식론은 “선형 인식론”으로 명명될 수 있는데, 이것은 자기대면으로부터 세계지각을, 세계지각으로부터 타자해석을 이성적으로 또는 경험적으로 도출해낸다. 그리하여 타자 마음은 세계 그림을 토대로, 세계 그림은 자아의 감각장을 토대로 선형적으로 구성된다. 데이빗슨은 이러한 선형 인식론을 공격하고 역전시켰으며, 그 대안으로서 이른바 “삼각 인식론”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개념적으로 기본적인 것은 자아의 자기대면이 아니라 타자의 지향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자 해석은 세계지각 및 자기대면과 독립된 인식 유형이 아니기 때문에, 인식은 단계적으로 출현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한꺼번에 출현한다. 그리하여 사고와 인식은 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타자와 세계의 존재를 동시에 요구한다. 마침내 우리가 얻는 새로운 코기토는 이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너-세계가 존재한다.
I. 들어가는 말
인식의 토대는 무엇인가? 그것은 가장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어떤 것이다. 무엇이 가장 확실하다고 인정되는가? 합리주의자와 경험주의자의 답변은 어떤 의미에서 상당히 공통적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합리주의자에게 그것은 나의 이성, 나의 확신, 나의 생각, 나의 의심이다. 경험주의자에게 그것은 나의 경험, 나의 자료, 나의 감각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나에게 일어나는 생각(코기토) 또는 나에게 주어진 것(데이타), 즉 내가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내 마음에 관한 나의 앎이다. 그렇다면 가장 덜 확실한 인식 형태로 간주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인의 마음 상태에 관한 앎이다. 그 중간에 세계에 관한 앎이 놓여 있다. 전통 인식론의 패러다임은 내 마음에 주어진 자료(주관적 앎)로부터, 외부세계에 대한 앎(대상에 관한 앎, 객관적 앎)을 경유하여, 마지막으로 타자 마음에 관한 앎(상호주관적 앎)으로 나아가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이 패러다임은 “선형 인식론”(linear epistemology)이라 불릴 수 있겠는데, 제II절에서 몇몇 선형 인식론의 표본들이 예시될 것이다.
이처럼 선형 인식론은 주관적인 것이 객관적 인식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후기분석철학자 데이빗슨 Donald Davidson은, 인식론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오히려 타자에 관한 앎이고, 맨 나중에 주관적 앎이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선형 인식론은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진다. 이 글의 목적은 데이빗슨의 이러한 인식론 뒤집기를 해설하고 향후 인식론을 전망하는 것이다. 선형 인식론은 주관표상으로부터 객관세계를 구성하려 하지만, 타자를 애초부터 배제하는 한,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심연이 놓이게 되고, 결국 그 인식론은 유아주의(이하 유아론)로 함몰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 타자가 요청되는데, 제III절에서는 타자의 인식론적 중요성이 발견되는 과정이 개괄될 것이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규칙-따르기 논제는 생각과 말이 필연적으로 타자 존재를 요청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러나 규칙-따르기 인식론은, 크립키의 해석이 보여주었듯이, 회의적 귀결을 갖는다. 인식의 사회성은 규칙-따르기가 아니라 다른 곳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인식은 두 주체의 공허한 대화에 의해 구성될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과 말은 타자뿐만 아니라 세계의 존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데이빗슨은 심리철학과 언어철학 탐구를 통해 하나의 삼각형, “한 사람, 그의 사회, 그리고 공유 환경으로 구성된 삼각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일생 탐구는 “[이] 삼각형을 파악하려는 시도의 역사”로 요약될 수 있다. 주관-상호주관-객관을 삼겹줄로 묶는 그의 새로운 인식론 패러다임은 “삼각형 인식론”(triangular epistemology) 또는 “삼각대 인식론”(tripod epistemology)라 부를 수 있는데, 제IV절에서 이것을 얻는 그의 논증이 해설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서 삼각 인식론의 함축과 의의를 전망하는 것으로 전체 글을 마무리지었다. 삼각 인식론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이 인식론이 일인칭 권위를 해명하지 못한다는 지적일 것이다. 그러나 삼각 인식론은 자아가 그 누구보다도, 다른 어떤 인식 대상보다도, 자기 마음에 가장 확실히, 가장 쉽게 접근한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지면관계상 이 논문에서 다루지 않을 것이다.
V. 나오는 말
데이빗슨의 삼각 인식론에 따르면 인식의 기초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것 속에 있다. 그래서 “마음들의 공동체는 인식의 기초이다. 이것은 만물의 척도를 제공한다. 이 척도의 적합성을 의문시하거나, 보다 궁극적 표준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제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다음과 같이 패러디될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너는 존재한다.” 즉 타자의 존재는 자아 사고의 필요조건이다. 그래서 “우리가 타인을 더 잘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내가 타인을 이해하는 데 게을리 할 때, 나는 세계와 점차 단절될 뿐만 아니라, 내 마음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삼각 인식론이 인식의 출발점을 상호주관적 앎에서 찾는다는 의미에서, 그 다음 객관적 앎으로, 주관적 앎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기존 선형 인식론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다. 그러나 상호주관적 앎은 제 홀로 갑자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식 유형과 함께 일거에 출현한다는 의미에서, 삼각 인식론은 더 이상 선형 인식론이라 불릴 수 없다. 데이빗슨은 기존 인식론을 뒤집었지만 그의 뒤집기는 파괴를 뜻하지 않는다. 그는 로티처럼 인식론 전체를 뒤집어엎어 그것을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칸트처럼 인식론의 기본 패러다임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놓아 또는 해체하여 그것을 보다 안전하게 세워 놓았다. 뒤집기 후에 다시 세워진 것은 인식 원천에 보다 깊숙이 보다 뾰족하게 박힌 모종의 기둥이 아니라, 깊이 박히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나 안전히 설 수 있는 삼각대이다. 그러나 이 삼각대(자기대면-타자해석-세계지각)는 “어느 한 다리라도 잃어버리면, 아무 다리도 설 수 없다.” 마침내 우리가 얻게 되는 새로운 코기토는 이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너-세계가 존재한다. 즉 나-너-세계는 사유의 필요조건이다.
삼각 인식론은 매우 중요한 함축을 지닌다. 첫째, 모든 인식은 이미 상당히 객관적이라는 사실이다. “생각의 소유는 필연적으로 개인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내용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형성하고 품고 있는 그 생각들은,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는 세계 속에,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세계 속에 개념적으로 위치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의 심적 상태들에 관한 우리의 생각들조차 똑같은 개념적 공간을 점유하며, 똑같은 공공적 지도 위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 나아가 가치판단 즉 윤리적 판단이나 미학적 판단들도 인식론적으로 적법하며, 때때로 객관적일 수 있다. 이러한 함축은 윤리학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