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철학김명석 2003, 양자 현상과 상황적 실재주의

양자현상과 상황적 실재주의

철학연구 87: 123-145, 대한철학회 2003



간추림

객관적 사물이 측정장치나 관측자 또는 측정행위와 어느 정도 독립하여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은 너무나 상식적인 생각이다. 만일 우리가 이 믿음을 포기한다면 이것은 곧 관념주의나 회의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양자역학의 정식체계가 전통적 의미의 실재성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양자역학 출현 이후 줄곧 주장되어 왔다. 특히 벨의 두 정리는 측정결과가 측정 전에 측정대상이 가지고 있던 물리적 속성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실재주의적 가정을 위태롭게 했다. 그러나 벨의 정리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은 실재성 개념을 전면적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개념의 적용을 제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의 목표는 양자역학의 실재주의적 해석에 대한 기존의 비판들을 염두에 두면서, 인식과 존재에 대한 기본적 상식을 유지하는 해석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 물리적 속성은 다른 물리적 속성들과 관련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는 존재론적 상황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I. 들어가는 말

괴팅겐의 하이젠베르크는 1926년 코펜하겐에 건너가서 보어와 함께 양자역학의 정식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격론을 벌였다. 그들의 토론이 깊어지면서 하이젠베르크를 당황하게 했던 것은 어떻게 자연세계가 이토록 미쳐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둘 사이에 지적 긴장감이 고조되자 그들은 감정적으로 예민해져서 따로 떨어져 있어야 할 정도였다. 보어는 노르웨이로 스키 여행을 가버렸고 하이젠베르크는 보어가 감정이 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했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양자현상을 이해하는 원리를 하나씩 마련해 있었고, 이들의 양자역학 해석은 점차 표준적 해석으로 굳혀졌다.

보어-하이젠베르크-보른의 코펜하겐 해석은 전통 물리학의 이념을 뒤엎는 인식론적 가정들을 전제하고 있다. 첫째, 물리학은 현상(측정결과)을 기술하는 것이지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즉 물리학은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관찰에 관한 것이다. 만일 물리학자가 단순히 실험결과를 기술하고자 한다면 그는 아무런 모순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현상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기술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는 형이상학자들처럼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다. 둘째, 측정장치의 세팅은 고전물리학 또는 일상언어를 통해 기술되어야 한다. 이 가정은 측정장치의 구체성을 인정함으로써 연구자들이 의사소통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 셋째, 양자역학은 개별 입자의 속성에 대한 완전한 기술을 제공한다. 만일 측정결과가 불확정적이고 확률적이라면 이것은 측정장치나 이론의 한계가 아니라 측정대상의 불확정성과 개연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코펜하겐 해석자들은 양자현상이 고전적 실재성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플랑크, 아인슈타인, 드 브로이, 슈뢰딩거 등 양자이론의 다른 창시자들은 고전적 실재성 개념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제2절에서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이들의 반대를 개괄할 것인데, 이들의 반대는 양자역학이 불완전한 이론이라는 아인슈타인-포돌스키-로젠의 논증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만일 물리계가 측정 전에 어떤 실제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완전한 이론은 그 속성을 기술하고 있어야 하지만, 양자역학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양자역학의 실재 기술은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이 논증의 전제들은 몇몇 형이상학적 원리들을 가정하고 있는데, 존 벨은 이 원리들이 양자현상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의 증명은 실재성 개념의 전면적 폐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제3절에서는 실재성 개념이 물리학에서 제거될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한 후, 제4절에서 양자역학과 양립할 수 있는 실재성 또는 객관성 개념을 제안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를 위해 한 물리적 속성이 다른 물리적 속성들과 관련 속에서 정의되어야 한다는 존재론적 상황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V. 나오는 말

고전적 가정에 따르면 물질 또는 입자는 시공간을 점유하며 물리적 힘에 의해 시공간적 위치를 바꾸는 실재물이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측정 전에 입자의 시공간적 위치를 언급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실제로 같은 물리적 “상태”에 있는 두 입자가 다른 위치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입자는 측정 전에 아무 크기도 아무 모양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아무 곳에도 위치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만일 코펜하겐 해석이 이것을 인정한다면, 양자역학이 관계하고 있는 것은 정녕 무엇인가? 그것은 이론이 그 존재를 만들어낼 수 없는 객관적 실재인가 아니면 단순한 측정결과들의 다발인가? 보어에 따르면 파동함수의 시간 진행을 계산함으로써 이론적으로 예측되는 것은 물리적 사물의 실제 속성이 아니라 고전 물리적으로 기술된 실험조건으로부터 나올 만한 실험결과들이다. 그래서 “위치”나 “스핀”이라 불리는 것은 사물이 측정 전에 가지고 있는 실제 속성이 아니라 거시적 규모의 복합적 측정 장치들의 세팅을 약기한 것에 불과하다. “양자세계는 없고 오직 추상적 양자물리적 기술만 있다. 물리학의 임무가 자연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물리학은 자연에 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에 상관한다.”

그러나 객관성 개념이나 실재성 개념을 완전히 폐기해 버린다면 측정 개념도 물리학이라는 학문도 성립할 수 없다. 몇몇 언어철학자들은 이 개념 없이 언어나 사고 현상을 해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극단적 관념주의는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우리 의지나 신념에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다는 상식을 유지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객관성 개념과 실재성 개념을 유지한 채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다면, 다른 많은 신념들을 포기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이해는 매우 장려할 만하다. 우리가 여기서 선보인 존재론적 해석은 전체성을 진정한 물리적 실제 속성으로 간주하는 전체론적 해석의 한 버전이다. 우리 해석은 전체적이고 비국소적인 물리량만이 물리적 실제 속성에 대응하는 존재량이며, 부분적 물리량은 전체적 물리량에 의해 상황적으로 규정되는 부수량이라고 가정한다. (고유속성은 언제나 존재량이다.) 이 가정을 수용할 때 우리가 얻게 되는 실재주의는 비국소적 상황적 실재주의이다. 실제로 사물의 속성이 그 사물의 다른 속성이나 다른 사물의 다른 속성과 독립되어 있지 않으며, 부분들의 성격과 본성이 전체의 속성에 의해 영향 받는다면, 세계는 더 이상 부분들의 집적체가 아니다. 부분은 세계의 한 측면에 불과하고, 그 측면들의 총합은 전체 세계와 동일하지 않다. 세계는 그런 측면들의 종합물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오히려 측면들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우리가 국소적 현상만을 감각하는 한, 그래서 전체 세계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의 세계 이해는 측면들에 관한 이해에 불과하며, 그 이해는 그만큼 불완전하고 불충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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