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철학김명석 2003, 존재에서 사유까지: 타자, 광장, 신체, 역사

존재에서 사유까지: 타자, 광장, 신체, 역사 

철학논총 33: 69-89, 새한철학회 2003



간추림

한 물체가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사고하는 존재가 되게 할 수 없다. 물체의 외양이 뱀처럼 생겼든 오징어처럼 생겼든, 그것이 알에서 부화된 것이든 실리콘 벨리의 연구실에서 제조된 것이든, 아마도 그것이 사고하는 데 아무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고가 없던 한 물체에게서 사고가 나타나게 하는 본질적 요소들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타자, 광장, 신체, 역사 등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자아가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자아는 타자와 함께 열린 광장 속에 놓여 있어야 하며, 타자와 자아는 각자의 반응이 상대편에게 인지될 수 있을 만큼 비슷한 신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아의 신체는 광장 내 공적 자극들과 인과적 접촉 역사를 가져야 한다. 나아가 자아는 자기 신체의 반응이 공적 자극과 역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과 그 공적 자극이 타자의 신체와도 유사하게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타자의 협력 없이 이러한 의식들은 자아에게 생겨날 수 없으며, 결국 제 홀로 남겨진 유아에게는 처음에 없던 사고가 새로 생겨날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은 여러 유아들이 어른 없이 자기들끼리 살아간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아우구스티누스는 참된 인식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회의주의자들에게 답하면서, ‘나는 오류를 범한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도출해 내었다. 데카르트 역시 확실성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나는 의심한다’로부터 ‘나는 존재한다’를 연역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내가 오류를 범하거나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결론들이 오직 나의 존재에 대한 확실성만은 아닐 것이다. 데카르트는 코기토에서 신의 존재와 사물의 존재까지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나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한 물체가 단순히 존재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사고하는 존재가 되게 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생각하고 의심하고 오류를 범한다면, 나는 결코 단순히 한 물체, 한 입자가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 물체에 어떤 것들이 추가되어야, 또는 어떤 배경 속에 놓여 있어야 그가 사고하는 존재일 수 있을까? 데이빗슨은 한 물체에 어떤 것이 첨가되어야 그가 사고하는 존재가 될 수 있는지, 또는 사람에게서 어떤 것을 제거해도 여전히 사고하는 존재로 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매우 상식적 답변을 제시한다.

먼저 한 물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에 출현하게 되었는지의 문제(기원의 문제)는 본질적이지 않을 것이다. 한 물품이 사고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사람과 비슷한 방식으로 잉태되고 출산될 필요는 없다. 만일 통나무가 번개를 맞아, 우연에 의해, 강금실과 물리적으로 모든 대목에서 동일한 대상으로 변했다면, 그 대상이 강금실처럼 사고하는 존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것은 사고현상이 물리현상에 수반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둘째, 신체를 구성하는 특정 재료들은 사고하는 존재가 되는 데 원리상 장애가 되지 않으며, 그것들은 사고의 출현을 위해 우연적인 항목일 뿐이다. 탄소와 산소 및 질소 대신에 규소나 인 및 황으로 만들어진 조직체가 사고할 수 없다고 말할 이유는 없다. 그래서 지성과 감성 및 의도 등은 신체를 구성하는 특정한 물질과 원리상 무관하다. 셋째, 주체의 외양과 크기도 본질적 요건이 아니다. 그래서 지성적 존재가 되기 위해 사람처럼 보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튜링은 기계가 사고할 수 있는가라고 자문하면서, 기계의 기원, 재료, 외양 등이 사고와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는 한 물체가 사고하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검사하는 테스트를 고안하는데, 질의자가 그 물체의 외양을 보지 못하도록 그것을 베일 뒤로 숨긴다. 그리고 질의자가 단지 그것의 음색을 듣고 섣불리 예단하지 않도록, 물체는 모니터 또는 인쇄기의 출력을 통해 질문에 응답한다. 튜링 테스트에서 검사대상이 베일 뒤에 숨겨져야 한다는 조건은 사고 현상과는 무관한 요소가 테스트에 개입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인간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거나 얼굴이 잘 생겼다는 이유로 그것이 사람처럼 생각한다고 판단하게 해서는 안 된다(Turing 1950, 55).

분명히 물체의 외양이 뱀처럼 생겼든 오징어처럼 생겼든, 그것의 피부가 점액질이든 갑각질이든, 그것이 알에서 부화된 것이든 실리콘 벨리의 연구실에서 제조된 것이든, 아마도 그것이 사고하는 데 아무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요소들이 한 물체에게서 사고가 출현하도록 하는가? 이 물음에 부분적으로나마 답변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대충 말해 자아가 생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먼저 자아와 비슷한 육체(얼굴)를 지닌 지적 타자들(공동체)이 존재해야 하며, 자아는 그러한 타자들의 존재를 의식해야 한다. 그리고 자아가 타자와 공동으로 반응할 수 있는 공적 자극들(세계)이 있어야 하고, 자아는 그런 공적 자극의 존재를 의식해야 한다. 그래서 자아는 자기 반응과 타자의 반응이 공적 자극에 의해 공통적으로 야기되기도 한다는 것과, 그 자극에 대한 그들 반응들이 서로 유사하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제2절에서 제4절까지 이런 요건들이 왜 필요한지 해명한 뒤, 제5절에서 나와 타자 및 세계 사이의 특히 어떤 상호작용이 사고를 출현하게 만드는지 탐구할 것이다. 이 해명과 탐구는 데이빗슨의 연구들에 거의 전적으로 빚지고 있다.


6. 나오는 말

나는 한갓 영혼 없는 자동기계로 태어나 사고하는 자아에 이를 때까지 성장해 나간다. 만일 내가 처음부터 사물들이 없는 빈 공간에서 연명하고 있었다면, 또는 광장이 아니라 밀실에 감금되어 있었다면, 비록 사물들은 있지만 나와 유사한 타자들이 없는 곳에서 살아 왔다면, 나의 반응은 아무런 공적 내용을 지닐 수 없었을 것이다. 타자가 나의 동물적 반응들을 공적 자극(객체)에 조건화하지 않았다면, 그가 나의 반응이 어느 자극에 조건화되었는지를 내가 자각하도록 나를 훈련시키지 않았다면, 늑대나 원숭이에 의해 길러졌던 아이들처럼 내가 접촉했던 이들이 객체 개념(또는 진리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나와 그의 반응을 야기하는 자극들을 공적 공간에 위치시킬 능력이 나에게 아직 생기지 않았다면, 나는 내 반응이 무엇에 의해 야기되었는지 판단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고현상은 오직 이미 사고하는 있는 타자들과[의] 접촉으로부터만 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사고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와 나의 반응이 공적 자극에 의해 공동으로 야기되곤 한다는 점을 그가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면, 그가 참으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나도 그 존재를 인정하기를 그가 바라지 않았다면, 그가 한 사물이 참으로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 속성들을 나도 그 사물에게 적절히 귀속시킬 수 있기를 그가 원하지 않았다면, 나는 사고능력을 지닐 수 없었다. 내 육체에 사고가 깃들기 위해서, 내가 진리 개념을 적절히 적용하기를 희망하고 이것을 이루려는 타자의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했다. 한 육체를 (사물이 공유되는) 공통세계와 (진리개념이 공유되는)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여기고 실제로 그렇게 만들려는 지적 타자들의 사랑은 인간 육체에 정신이 깃들게 하는 바로 그 힘이다. 이 사랑은 그저 그런 물리적 사건들에 불과한, 육체들 속에 일어나는 신경생리학적 과정들과 저기 바깥의 열역학적 소란들을 결집하여 하나의 심적 사건을 만들어내는 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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