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수반, 자유를 봉쇄하다
철학논총 38: 127-141, 새한철학회 2004
간추림
물리주의자들은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리적 차이가 없는 곳에 심적 차이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물리적 사건들의 결정론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미래 사건은 과거 사건의 물리적 속성과 물리법칙에 의해 완전히 고정된다. 그러나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과 심신수반이 무엇을 함축하는지는 여태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일단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을 받아들이면, 강수반이든 약수반이든, 지역적 수반이든 세계적 수반이든, 모든 심신수반은 심적 사건의 자유로운 발생을 보장하지 못한다.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조차도 이 물리적 세계 속에서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마련해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옹호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심신수반을 거부하거나,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을 포기해야 한다. 바람직한 대안은 심신수반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이 세계가 물리적으로 닫힌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 대안은 순수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을 부정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1. 들어가는 말
결정론은 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이 과거 사건들에 의해 확정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자유의지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인간 행위가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고 믿는다. 이러한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의 대립과 화해는 여태 형이상학을 주도하고 변형시켰던 철학의 핵심문제들 중 하나였다. 한편 양립가능론자들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두 입장의 대립을 논리적․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상이한 태도의 문제로 간주한다. 또는 자유의 개념을 적절하게 변형하거나 재해석함으로써 역학적 세계 내에서 자유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가령 자유는 무질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칙의 준수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매우 강력한 논증이 존재한다. 결정론은 시간 t1에 발생한 세계사건 a와 그 이후 시간 t2에 발생한 세계사건 b가 결정론적 물리법칙에 의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t2에 발생하는 사건 b의 모든 속성들은 t1에 발생한 사건 a의 속성들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일단 물리법칙과 과거 상태가 주어지면, 이 세계에서는 오직 하나의 미래 상태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결정론적 세계 속에서 두 개의 미래가 있을 수 없으며, 선택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반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그가 의도나 행위에서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결정론적 물리법칙이 행위자가 오직 한 방향으로만 행위하도록 강제한다면, 그에게 아무런 선택권도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행위자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면, 그가 어떻게 자기원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결정론적 세계에서 자유로운 사건이 출현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만일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면, 우리는 둘 중에서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우리는 결정론을 버리고 자유의지를 취해야 할 매우 강력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의 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불가능하며, 자유로운 행위가 실재한다고 가정하기로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의지를 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의지는 결정론적 엄밀 법칙의 지배를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건들을 야기할 수 있는 특이한 사건의 존재를 요구한다. 만일 이 특이한 사건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또는 존재해야 한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이 세계는 순수 물리적 세계가 아닌가? 이 세계는 법칙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으로 분할되어 있는가? 다만 현재의 물리학이 근본적으로 틀렸을 뿐인가?
다시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물리법칙이 원리상 결정론적이라고 가정하겠다. 이를 가정할 경우, 결정론을 부정하는 것은 이 세계가 물리법칙의 완전한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논제를 부정하는 것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가 결정론을 버리고 자유의지를 취한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구하기 위해, 물리주의를 포기하든가 물리학을 수정하든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범적 부분과 형이상학적 부분을 최대한 뺀 근본 물리학은 독자적 정당화 과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진리성은 경험적으로 이미 상당히 확고하다. 그래서 아마도 자유의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은 물리학의 진리성이 아니라, 물리학이 모든 현상에 적용된다는 물리주의(유물론)일 것이다. 물리학의 진리성이 보존된다면, 모든 사건들 사이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과적으로 연결된 물리적 사건들 사이에서는 결정론적 연관이 있다는 것을 최소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물론 여하한 이유로 궁극적 물리학조차 원리상 그 진리성이 위태롭게 된다면, 또는 물리학의 핵심 탐구대상인 물리법칙 같은 것이 실제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와 함께 물리주의를 받아들일 이유도 그만큼 상실될 것이다.
이 논문의 목표는 자유의지를 보존하기 위해, 물리주의에 어떤 수정이 가해져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주요 공격 대상은 심신수반 논제이다. 사실 김재권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물리주의 노선에 서 있는 심성에 관한 모든 이론들이 심신수반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미 김재권은 우리가 수반논제를 확고하게 받아들일 때 심리철학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는다. 이것을 제2절에서 짧게 요약한 다음, 김재권의 지역적 강수반이 자유의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것을 제3절에서 논증할 것이다. 제4절과 제5절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통해 자유의지를 해명하려는 데이빗슨의 해법을 다룰 것이다. 그의 해법은 지역적 강수반 대신에 지역적 약수반 또는 세계적 약수반을 도입하는 것인데, 그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각 절에서 논증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유의지가 데이빗슨이 애초에 설정했던 것보다 더 강한 심성의 무법칙성을 요구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자유의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일단 지역적 수반을 받아들이는 심신수반뿐만 아니라 세계적 수반을 염두에 둔 심물수반까지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심성은 어디에서 출현하는가? 마지막 절은 이에 대한 기본적 아이디어를 예고하는 데 할애하고자 한다.
6. 나오는 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심신수반이 자유를 원천봉쇄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결론을 얻기 위해서 물리적 사건들의 결정론을 가정해야 한다. 따라서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을 포기하든지, 심신수반을 부정해야 한다. 우리는 애초부터 자유의지를 취하기로 작정했다. 한편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은 근본 물리학의 이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람직한 선택은 물리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반을 거부하는 것이다. 거부되어야 하는 수반은 개인의 심적 속성과 그의 신체 속성 사이의 수반뿐만 아니라, 전체 세계의 심적 속성과 그것의 물리적 속성의 수반까지도 포함된다.
만일 심적 차이가 현재의 물리적 차이에 놓여 있다면, 그것이 신체 안이든 세계 어딘가이든, 현재 물리적 차이가 없을 경우, 심적 차이도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수반을 거부하는 것은 심적 차이가 현재의 물리적 차이에 놓여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과거의 물리적 차이가 현재의 심적 차이를 낳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사실 역사적 차이는 현재의 물리적 차이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 심적 차이가 역사적 차이에 놓여 있다는 제안은 심성이 물성에 의해 실현된다는 통찰을 여전히 유지한다. 그래서 이 제안은 한편으로 순수 물리적 사건들의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고, 다른 한편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심성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새로운 대안이기를 희망한다. 이에 대한 논의를 여기서 치밀하고 포괄적으로 다를 수는 없으니, 이것을 요약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심적 속성이 역사적 차이에 있다는 주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 해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심적 속성이 심적 내용에 의해 개별화된다는 점이다. 한 심리현상에 다른 심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그 현상이 다른 심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적 내용이 역사적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크립키, 퍼트넘, 데이빗슨 등에 의해 잘 논증되었다. 그런데 속성의 개별화가 인과적 효력에 놓여 있다는 논제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면, 심적 속성들의 개별화가 다른 사건을 야기하는 능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내용의 차이는 단순히 속성의 차이뿐만 아니라 인과적 효력의 차이를 의미한다. 이 논의가 현실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역사적 차이가 인과력의 차이를 낳을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적 속성의 차이가 단순히 물리적 속성의 차이가 아니라 역사적 차이에 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가정을 받아들이면, 이 세계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닫힌 세계가 될 수 없다. 한 사건은 물리적 속성과 심적 속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지만, 그 사건은 물리법칙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순수 물리적 사건이 아니다. 오직 물리적 속성만 가지는 사건들만이 결정론적 엄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
심신수반, 자유를 봉쇄하다
철학논총 38: 127-141, 새한철학회 2004
간추림
물리주의자들은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물리적 차이가 없는 곳에 심적 차이도 없다. 그리고 그들은 대체로 물리적 사건들의 결정론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미래 사건은 과거 사건의 물리적 속성과 물리법칙에 의해 완전히 고정된다. 그러나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과 심신수반이 무엇을 함축하는지는 여태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일단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을 받아들이면, 강수반이든 약수반이든, 지역적 수반이든 세계적 수반이든, 모든 심신수반은 심적 사건의 자유로운 발생을 보장하지 못한다. 데이빗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조차도 이 물리적 세계 속에서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마련해줄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자유의지를 옹호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심신수반을 거부하거나,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을 포기해야 한다. 바람직한 대안은 심신수반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는 이 세계가 물리적으로 닫힌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물론 이 대안은 순수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을 부정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1. 들어가는 말
결정론은 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이 과거 사건들에 의해 확정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한편 자유의지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인간 행위가 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라고 믿는다. 이러한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의 대립과 화해는 여태 형이상학을 주도하고 변형시켰던 철학의 핵심문제들 중 하나였다. 한편 양립가능론자들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두 입장의 대립을 논리적․이론적 문제가 아니라 상이한 태도의 문제로 간주한다. 또는 자유의 개념을 적절하게 변형하거나 재해석함으로써 역학적 세계 내에서 자유의 가능성을 추구한다. 가령 자유는 무질서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칙의 준수에 의해 얻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이 양립할 수 없다는 매우 강력한 논증이 존재한다. 결정론은 시간 t1에 발생한 세계사건 a와 그 이후 시간 t2에 발생한 세계사건 b가 결정론적 물리법칙에 의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t2에 발생하는 사건 b의 모든 속성들은 t1에 발생한 사건 a의 속성들에 의해 완전히 결정된다. 일단 물리법칙과 과거 상태가 주어지면, 이 세계에서는 오직 하나의 미래 상태만이 가능하다. 이것은 결정론적 세계 속에서 두 개의 미래가 있을 수 없으며, 선택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반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진다는 것은 그가 의도나 행위에서 선택권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만일 결정론적 물리법칙이 행위자가 오직 한 방향으로만 행위하도록 강제한다면, 그에게 아무런 선택권도 주어질 수 없을 것이다. 행위자에게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면, 그가 어떻게 자기원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결정론적 세계에서 자유로운 사건이 출현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만일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양립할 수 없다면, 우리는 둘 중에서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 우리는 결정론을 버리고 자유의지를 취해야 할 매우 강력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의 주제를 분명히 하기 위해 결정론과 자유의지는 양립불가능하며, 자유로운 행위가 실재한다고 가정하기로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의지를 취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유의지는 결정론적 엄밀 법칙의 지배를 벗어나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건들을 야기할 수 있는 특이한 사건의 존재를 요구한다. 만일 이 특이한 사건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또는 존재해야 한다면,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가? 이 세계는 순수 물리적 세계가 아닌가? 이 세계는 법칙의 영역과 자유의 영역으로 분할되어 있는가? 다만 현재의 물리학이 근본적으로 틀렸을 뿐인가?
다시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우리는 물리법칙이 원리상 결정론적이라고 가정하겠다. 이를 가정할 경우, 결정론을 부정하는 것은 이 세계가 물리법칙의 완전한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논제를 부정하는 것에 해당된다. 따라서 우리가 결정론을 버리고 자유의지를 취한다는 것은, 자유의지를 구하기 위해, 물리주의를 포기하든가 물리학을 수정하든가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범적 부분과 형이상학적 부분을 최대한 뺀 근본 물리학은 독자적 정당화 과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진리성은 경험적으로 이미 상당히 확고하다. 그래서 아마도 자유의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은 물리학의 진리성이 아니라, 물리학이 모든 현상에 적용된다는 물리주의(유물론)일 것이다. 물리학의 진리성이 보존된다면, 모든 사건들 사이에서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과적으로 연결된 물리적 사건들 사이에서는 결정론적 연관이 있다는 것을 최소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물론 여하한 이유로 궁극적 물리학조차 원리상 그 진리성이 위태롭게 된다면, 또는 물리학의 핵심 탐구대상인 물리법칙 같은 것이 실제로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와 함께 물리주의를 받아들일 이유도 그만큼 상실될 것이다.
이 논문의 목표는 자유의지를 보존하기 위해, 물리주의에 어떤 수정이 가해져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주요 공격 대상은 심신수반 논제이다. 사실 김재권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물리주의 노선에 서 있는 심성에 관한 모든 이론들이 심신수반을 공통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미 김재권은 우리가 수반논제를 확고하게 받아들일 때 심리철학에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잘 보여주었는다. 이것을 제2절에서 짧게 요약한 다음, 김재권의 지역적 강수반이 자유의지를 원천적으로 봉쇄한다는 것을 제3절에서 논증할 것이다. 제4절과 제5절은 무법칙적 일원론을 통해 자유의지를 해명하려는 데이빗슨의 해법을 다룰 것이다. 그의 해법은 지역적 강수반 대신에 지역적 약수반 또는 세계적 약수반을 도입하는 것인데, 그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각 절에서 논증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유의지가 데이빗슨이 애초에 설정했던 것보다 더 강한 심성의 무법칙성을 요구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자유의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일단 지역적 수반을 받아들이는 심신수반뿐만 아니라 세계적 수반을 염두에 둔 심물수반까지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심성은 어디에서 출현하는가? 마지막 절은 이에 대한 기본적 아이디어를 예고하는 데 할애하고자 한다.
6. 나오는 말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심신수반이 자유를 원천봉쇄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결론을 얻기 위해서 물리적 사건들의 결정론을 가정해야 한다. 따라서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을 포기하든지, 심신수반을 부정해야 한다. 우리는 애초부터 자유의지를 취하기로 작정했다. 한편 물리적 사건의 결정론은 근본 물리학의 이념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람직한 선택은 물리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수반을 거부하는 것이다. 거부되어야 하는 수반은 개인의 심적 속성과 그의 신체 속성 사이의 수반뿐만 아니라, 전체 세계의 심적 속성과 그것의 물리적 속성의 수반까지도 포함된다.
만일 심적 차이가 현재의 물리적 차이에 놓여 있다면, 그것이 신체 안이든 세계 어딘가이든, 현재 물리적 차이가 없을 경우, 심적 차이도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수반을 거부하는 것은 심적 차이가 현재의 물리적 차이에 놓여 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과거의 물리적 차이가 현재의 심적 차이를 낳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사실 역사적 차이는 현재의 물리적 차이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 심적 차이가 역사적 차이에 놓여 있다는 제안은 심성이 물성에 의해 실현된다는 통찰을 여전히 유지한다. 그래서 이 제안은 한편으로 순수 물리적 사건들의 결정론을 부정하지 않고, 다른 한편 형이상학적 이원론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심성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새로운 대안이기를 희망한다. 이에 대한 논의를 여기서 치밀하고 포괄적으로 다를 수는 없으니, 이것을 요약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심적 속성이 역사적 차이에 있다는 주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해명해야 할 것이다. 이 해명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심적 속성이 심적 내용에 의해 개별화된다는 점이다. 한 심리현상에 다른 심적 내용을 부여하는 것은 그 현상이 다른 심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적 내용이 역사적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은 크립키, 퍼트넘, 데이빗슨 등에 의해 잘 논증되었다. 그런데 속성의 개별화가 인과적 효력에 놓여 있다는 논제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면, 심적 속성들의 개별화가 다른 사건을 야기하는 능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내용의 차이는 단순히 속성의 차이뿐만 아니라 인과적 효력의 차이를 의미한다. 이 논의가 현실적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역사적 차이가 인과력의 차이를 낳을 수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심적 속성의 차이가 단순히 물리적 속성의 차이가 아니라 역사적 차이에 있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가정을 받아들이면, 이 세계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닫힌 세계가 될 수 없다. 한 사건은 물리적 속성과 심적 속성을 동시에 가질 수 있지만, 그 사건은 물리법칙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순수 물리적 사건이 아니다. 오직 물리적 속성만 가지는 사건들만이 결정론적 엄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