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김명석 2006, 의미론적 신 존재 증명

의미론적 신 존재 증명

기독교철학 3호: 51-68, 기독교철학회 2006



간추림

우리는 많은 것들을 증명 없이 믿고 있다. 사물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증명 없이 그것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 존재를 부정할 때 존재 증명을 시도하게 된다. 자아의 존재는 정말이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엄연히 있기 때문에 자아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신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매우 당연하게도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신 존재 증명들의 목표는 다만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하나의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양한 논증들이 철학사에 계속 등장했다. 존재론적 논증, 우주론적 논증, 목적론적 논증 등이 제안되었고 각 논증에는 다시 다양한 버전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제안될 논증은 여태 제안된 범주에는 속하지는 않는다. 굳이 이름을 붙이지만 의미론적 신 존재 증명인데 일종의 초월적 증명이다.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다.

이 논문에서 신은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지적 타자”로 은연중에서 정의하고 있다. 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두 논제를 증명한다. 첫째, 한 피조물이 말할 수 있기 전에 이미 지적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 둘째, 지적 타자가 없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지적 타자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 두 논제를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정들을 도입할 것이다. 진리 개념을 가지지 않다면 언어를 가질 수도 없다, 사물의식이 없다면 진리 개념을 가질 수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 사물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최초로 출현했을 때 그들은 사물의식을 가지지 않았다, 진리 개념을 가진 타자의 도움 없이는 사물의식이 없던 이에게 사물의식이 발생되지 않는다 등. 논문에서는 이 전제들 각각에 대해 정당화를 할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무엇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전자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과학적 실재주의자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전자의 존재를 증명할 것이다. 물리학은 “수소 원자는 전자 하나를 가지고 있다”를 수용하고 있다. 물리학은 과학 즉 참된 지식체계이다. 참된 지식체계 내의 한 진술은 참된 진술이다. 따라서 “수소 원자는 전자 하나를 가지고 있다”라는 진술과 ‘전자’가 포함된 다른 진술들이 참되기 위해서 전자는 존재해야 한다. 이처럼 과학적 실재주의에 따르면, 한 지식체계(과학)가 어떤 항목의 존재에 대한 진술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항목은 실재한다. 그래서 만일 입자물리학이 과학이고, 입자물리학이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진술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쿼크들은 실재한다. 마찬가지로 복소함수론이 등식 “eiπ + 1 = 0”을 이론 내에서 정당화된 진술로 받아들인다면, 그리고 복소함수론이 참된 지식체계라면, 복소수 i는 실재한다.

그렇다면 입자물리학이나 복소함수론이 지식체계라는 가정은 어떻게 검사할 수 있는가? 경험과 일치는 입자물리학을 지식체계로 만드는 데 충분하지 않다. 공리체계로부터 연역은 복소함수론을 지식체계로 만드는 데 충분하지 않다. 경험과 부합이나 공리체계로부터 연역은 그 이론을 믿을 나름의 이유를 제공할 뿐이다. 그래서 입자물리학이 경험과 부합할수록 쿼크가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보다 그럴듯해진다. 복소함수론이 직관적 공리체계들로부터 모호성 없이 연역될수록 복소수가 존재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보다 그럴듯해진다.

그러나 쿼크나 복소수가 존재한다는 확실한 논증은 아무도 고안하지 못했고 어쩌면 고안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사정은 매우 일상적인 사물, 돌, 쇠, 나무, 버스, 빌딩, 지구, 은하계, 은하단 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제주도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그렇지 않는 것보다 훨씬 그럴듯한 믿음이다.

내가 이 논문에서 하려는 것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증명”이 너무 강한 표현처럼 들린다면 “논변”이라 해도 좋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 하나의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매우 당연하게도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이것은 제주도의 존재를 확실하게 증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한 지금 제안할 신 존재 증명이 제주도 존재 증명보다 더 강한 논증이라고 장담하지도 못한다. 다만 신의 존재를 믿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더 그럴듯하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여기서 제시할 논변은 고색창연한 명예의 전당에 모셔진 다른 신 존재 증명들과 별 관련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초월[론]적 증명이다. 어떤 철학자는 만일 경험 일반이 가능하다면, 물자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식으로 물자체의 존재를 증명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만일 언어가 가능하다면, 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 이것이 이 논문에서 내가 하려는 것이다.


4. 나오는 말

나의 논증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인간 언어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강변할 것이다. 물론 이런 강변은 주로 자연주의 존재론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존재론이 의미이론에 선행한다는 교리를 신봉한다. 일반적으로 의미이론은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하나는 의미가 인간 발화의 해석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는 구성적 과제이다. 다른 하나는 의미가 세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지 보여주는 공학적 과제이다. 의미가 세계와 오직 물리적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하는 자연주의는 공학적 과제를 수행하면서 일단 의미를 두뇌나 신경 시스템의 물리적 상태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콰인, 퍼도, 드레스키, 밀리컨, 처치랜드, 데닛 등의 프로그램은 이 경향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사고와 언어를 산출해 내는 인간 인지능력을 물리적으로 또는 공학적으로 설명하기를 원하는 자연주의자들에게는 물리주의적 존재론이 사고나 언어의 본성에 방법론적으로 우선한다. 그러나 세계의 구성에 대한 존재론을 의미에 대한 탐구에 무작정 적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오히려 의미이론의 규범적 원리들이 인간 발화의 해석에 우선권을 갖는다. 의미이론의 규범적 원리에 따르면 문장은 진리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그 자체로 구조화되어야 하고 단어의 지시는 그 단어를 포함하는 참된 문장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결정된다. 언어가 진리 개념을 필요로 한다는 전제는 이러한 통찰로부터 나왔다.

물리주의자의 시각에서 보면, 사람은 언제나 이 물리세계 속에, 시공간적 위치를 가지고, 물리세계의 인과적 폐쇄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언어는 물리적 세계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어야 한다. 처음에 언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무리도 나중에는 스스로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쉽게 가정해 버린다. 그러나 우리가 특별한 존재론과 형이상학을 미리 가정하지 말고 다만 언어에 대한 규범적 요구를 먼저 수용한다면,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무리가 스스로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합당한 귀결이다.

이 논문에서 제안된 세 개의 논증은 보다 깊은 성찰과 탐구가 요구되는 논제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각 논제들은 다른 많은 주제들과 연관되어 있다. 진리이론, 의미이론, 심리철학, 해석이론 등. 이 논증을 보다 정교하게 하고 세련되게 하는 것은 미래 과제로 남겨 놓는다. 글을 마치기 전에 이 글에서 그 존재가 논증된 신은 인격신이라는 점을 언급해 놓을 필요가 있다. 그는 말하는 존재이다. 그는 말을 걸기도 하고 말을 듣기도 한다. 그는 인간 육체가 타자와 사물을 의식할 수 있게끔 그 육체와 상호작용한다. 그는 인간 육체가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기를 희망함으로써 그 육체가 진리 개념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다. 그는 사람이 진리 개념을 가질 때 기뻐하는 인류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다.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