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김명석 2006, 심적 인과: 가능한 시나리오

심적 인과: 가능한 시나리오

분석철학회 2006년 봄 학술발표회



1. 내용의 신비로운 염력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녀 목청의 떨림은 주위 공기 분자들의 속도를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킨다. 이러한 증가와 감소의 파동이 내 귀에 전달되어 내 고막을 흔들고 이 흔들림의 자극은 신경 이온의 흐름을 야기한다. 이 전기신호는 내 두뇌에 특정 신경회로를 활성화하며 나는 이 신경회로와 결부된 내용을 파악하게 된다. “이제 너랑 그만 만나야 되겠어!” 이 내용은 “장래에 그녀와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녀를 자주 보는 일은 나의 쾌락을 증가시킨다”, “그녀를 보지 못하는 것은 쾌락의 감소를 가져온다”, “그 쾌락의 감소를 상쇄시킬 만한 다른 사건이 예비되어 있지 않다”, “그녀는 나를 이해해주지 못했다”, “이해 받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등 무수한 다른 내용들을 야기한다. 이 내용들의 네트워크는 두뇌 내 신경회로의 폭주를 낳고, 이러한 폭주는 과도한 호르몬의 분비와 심장의 빠른 박동을 낳으며 결국 가슴이 터질듯 한 고통을 야기한다. 내 몸은 난동을 부리고 나는 어쩌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사소한 음파에서 나의 파국에 이르는 사건들의 연쇄에서 내용의 인과적 힘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어디에 존재하며,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떻게 내 신체 상태의 급격한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가? 내용은 쉽게 말해 곧 심적 사건의 속성이다. 질량, 전하량, 스핀, 위치, 속도, 그리고 이것들의 복합물인 온도, 밀도, 탄성, 점성, 날카로움 등과 같은 물리적 속성들이 물리적 인과에 개입하듯이, 내용은 심적 인과에 개입한다. 내용의 위치와 구성에 대한 답변들은 존재론에 의해 상당히 좌우된다. 그의 존재론이 유심론(관념주의)라면 내용은 관념이며, 물리적 속성은 관념의 산물이다. 그의 존재론이 유물론(물리주의)이라면 내용은 물리적 속성의 복합물이다. 이원론자는 내용과 물성을 세계를 구성하는 두 독립적 실체로 간주할 것이다. 이원론과 유심론은 우리에게 매우 불편한 주장이고 이에 대한 반대나 옹호를 다루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물리주의는 현대 존재론의 챔피언이라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김재권은 가장 설득력 있게 그리고 매우 극단적으로 물리주의를 옹호하였다. 그가 보다 온건한 물리주의로 물러서지 않는 이유는 그런 물리주의들은 심성의 인과적 효력을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물리주의가 그다지 매력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반물리주의적 편견에 의거하여 심적 인과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모델을 제안하고자 한다. 이 모델은 무엇보다 부수현상론을 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는 부수현상론을 피하는 다양한 대안들 중에서 수반을 거절하는 대안을 채택한다. 수반을 거절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세계적 결정론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나는 제2절에서 김재권의 부수현상론 논증을 요약하고, 제3절에서 수반이 세계적 결정론을 함축한다는 것을 보인 후 제4절에는 세계적 결정론이 자유의 여지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런 다음 제5절과 제6절에서 수반 없는 실현의 한 모델로서 역사적 실현 모델을 제안하고자 한다.


7. 나오는 글

제안된 시나리오는 일원론을 유지하면서 심성의 자율성과 인과적 효력을 보장한다. 그러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일원론은 매우 이상한 존재론으로 비쳐진다. 나의 존재론은 중립적 일원론과 양면이론을 적절히 섞어 놓은 것이다. 이에 대해 짧게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 싶다. 각 교리들에 대한 해설과 이유들은 보다 성숙된 논의를 요구한다.

I. 우리는 세계 내 현상들을 기술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세계를 사물들 또는 사건들로 분할할 수 있다. 사물과 사건은 세계 내 현상들의 변화들을 추적하기 위해서 도입된다. 전체 세계로부터 분할되는 것들은 인과관계의 관계항으로 간주되는 것들이다.

II. 동역학 법칙은 물리적 속성들의 변화를 지배하며 물리적 속성들을 관련짓고 그 변화를 기술한다. 개별적 물리적 인과작용은 이 동역학 법칙을 예화한다. 한편 물리적 입자들은 물리적 속성들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상정된 것이다. 동역학의 예측이 실재와 부합한다면, 상정된 이 입자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 입자들은 물리적 인과관계의 기본적 관계항들이다. 종국적으로 현대 물리학은 우리 세계를 렙톤, 쿼크, 게이지입자들로 분할한다. 이것들은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물리적 재료들이다.

III. 비록 물리학에 의해 분할된 부분들이 물리적 실체라 하더라도, 전체로서 우리 세계가 그 자체로 물리적 실체라고 단정하지는 못한다. 전체로서 현재의 우리 세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중립적 실체이다.

IV. 물리학을 통해 세계를 분할하는 것이 유일한 분할 방식은 아니다. 세계 내 현상들의 변화들을 추적하는 다른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해석학(해석이론) 또는 심리학(철학적 심리학)이라 불러도 좋다. 이 방법 역시 인과적 관계항들로 추정되는 것들을 전체 세계로부터 분할한다.

V. 물리학과 해석학은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분할한다. 해석학은 세계 내 현상들을 기술하거나 설명하기 위해 내용들을 상정한다. 내용을 지닌 사건들은 심적 사건으로 불릴 수 있다.

VI. 전체로서 우리 세계는 분할된 내용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듯이 분할된 물리적 재료들의 단순한 총합도 아니다. 그러나 세계를 물리적으로 분할한 것이 인과적 효력을 지니듯이, 세계를 심적으로 분할한 것도 인과적 효력을 지닐 수 있다. 왜냐하면 분할 자체가 현상들의 변화와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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