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철학김명석 2007, 해석과 사랑

해석과 사랑

한국논리학회 2007년 학술발표회 발표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우리는 물과 불과 흙과 공기로 구성된 세계를 보고 있다. 그것들은 질량과 운동성을 가지며 열기와 점성을 가지고 있다. 물리학자들은 이 세계를 묘사하는 데 보다 전문성을 발휘한다. 그들은 이 세계에서 쿼크와 렙톤과 게이지 입자들의 웅성거림을 본다. 그래서 세계는 곧 이런 입자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곳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들은 곧 물리적 사물이자 물리적 변화들이다. 우리가 세계 내 사물들과 변화들을 물리적으로 기술할 때야 세계가 제대로 파악된다. 세계를 제대로 기술하기 위해 우리는 질량과 전하량과 변위와 속도와 가속도와 스핀 등 물리적 술어들을 도입한다.

한편 우리는 자주 인간 물체의 구강 부위 피부의 규칙적인 운동과 진동을 목격하고 주변 공기 밀도의 변화들을 감지한다. 이 변화들은 오직 우리 오감을 통해서 감지된다. 시각은 일정 영역의 전자기파를, 청각은 일정 영역의 음파를, 후각은 기체 상태의 일부 분자를, 미각은 액체 상태의 일부 분자를, 촉각은 압력의 강도와 온도를 감지한다. 여기에 그 어떤 비물리적인 것도 유입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만일 인간 물체의 발화 현상도 완벽하게 물리적 사건의 일종이라면 물리적 술어로 이 현상을 기술할 때 아무 것도 놓치는 것이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발화 현상을 순수하게 물리적으로 기술할 때 우리는 이 현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실패한다. 한갓 물리적 사건으로 돌릴 수 없는 이 특이한 사건들을 우리는 심적 사건 또는 지향적 사건의 범주에 넣는다. 이 범주 내에 있는 사건들을 제대로 기술하기 위해 믿음과 욕구와 의도 등 심적 술어를 도입해야 한다. 만일 이 지향적 사건들이 이 세계 속에 별도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더 이상 이 세계를 물리세계라 부르지 않아야 한다. 물리세계가 우리 세계의 모든 것은 아니다.

지향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과 별로도 존재한다면 물리세계는 이 세계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우리는 세계를 한편에서 물리세계로 인식하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 지향세계로 인식하고 있다. 한 동전에서 어떤 때는 숫자가 있는 면을 보고 다른 때는 그림이 있는 면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세계의 한 면에서 자연세계를, 다른 면에서 지향세계를 보고 있다. 이 발표문은 이 황당한 존재론과 인식론을 다소 그럴듯하게 선전하려는 기획의 초안이다. 기획은 몇 가지 과제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우리는 물리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며 어떻게 기술하는가? 둘째, 우리는 지향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며 어떻게 기술하는가? 셋째, 물리세계와 지향세계가 어떻게 인과적으로 완결된 한 세계의 두 측면이 될 수 있는가? 이 발표문은 둘째 기획의 일부분에 속한다.

여기서 발표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향세계를 제대로 기술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반드시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이 발표자가 기획하고 있는 거대 담론 내에 적절히 붙박인다면 매우 엉뚱하게 단순한 형이상학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형이상학을 “신양면이론”이라 부를 수 있다. 발표문의 내용은 신양면이론의 한 부분을 구성하기 때문에 이 내용을 더 잘 제시하기 위해 먼저 제2절에서 신양면이론을 개괄하는 것이 좋겠다. 제4절은 사랑의 필요성을 가능한 한 명료하게 증명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발표문 전체가 한 단계 한 단계 정교한 논증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것은 이후 과제로 남겨 놓아야 할 것 같다. 다만 과도한 형이상학적 비약을 남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비판해 주기를 바란다. 부록에서는 자연세계 재구성 프로그램을 요약해 놓았다. 이 프로그램은 비록 명시적이지 않지만 현대 물리학 교과서에서 매우 일반적이라고 믿는다. 발표자는 이 프로그램을 지향세계 재구성 프로그램에 유비적으로 적용해 보았다.

 


5. 나오는 말

몇 가지 과제를 남겨 놓은 채 발표문을 마쳐야 할 것 같다. 첫째, (PC1), (PC2), (PC3)를 하나의 문구로 정식화하는 것. 그것은 아마도 화자의 지향적 반응들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것과 본성상 부합할 것이라고 가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석이론의 적용 대상을 경우문장에 한정했으므로, 이 발표문에서 드러난 PC는 PC가 마땅히 수록해야 하는 전체 내용의 일부에 불과하다. 해석이론을 화자의 전체 문장에 적용하기 위해서 우리는 화자의 지향적 반응들이 전체적으로 정합적일 것이라고 가정해야 할 것이다. 이미 데이빗슨은 후자를 “정합의 원리”로, 전자를 “대응의 원리”로 부른 적이 있다.

둘째, PC가 어떻게 심적 술어(속성)를 정의하는지 보이는 것. 우리는 세계 내 한 존재를 지향적 행위자로 묘사할 때 우리는 그 존재와 연관된 현상에 이미 PC를 적용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PC를 적용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존재도 지향적 행위자로서 묘사할 수 없다. 이것은 물리학과 화학과 생물학과 유전학과 신경생리학과 동물행동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물리적 사물에 대한 담론과 지향적 행위자에 대한 담론은 주제가 다른 담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주제의 변경 없이 한 담론에서 다른 담론으로 연속적으로 옮겨 갈 수 없다. 전자는 PN에 근거하여 현상을 기술하는 담론인 반면 후자는 PC에 근거하여 현상을 기술하는 담론이다. 그리하여 PC는 심적 어구를 물리적 어구로부터 항구적으로 분할하는 원리이다.

자연과학의 개념들로부터 심적 개념들을 구획하는 기본적 “미덕”[힘, virtue]은 행위자의 사고와 발언과 여타 행위들을 이해하는 데 요구되는 특수한 유형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하나의 미덕이 아니라, 단지 생각하는 존재의 사고와 행위와 말을 이해하는 하나의 조건이다. Davidson 1999, “Reply to Richard Rorty”, in L. E. Hahn 1999, ed. The Philosophy of Donald Davidson, Open Court, pp. 599~600.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