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철학김명석 1998, 학문으로서 메타물리학

학문으로서 메타물리학

철학연구 66: 1-19, 대한철학회 1998


제1저자: 김명석

교신저자: 최상돈



들어가는 말


사람은 많은 물음을 가지고 있다. 자연에 관한 물음에서부터 삶에 관한 물음까지 그 물음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다. 어떤 종류의 물음은 이미 대답되었지만 다른 종류의 물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끊임없이 제기된다. 물음에 대한 모범적 답안은 학문 또는 과학science에서 제시된다. 자신의 물음에 대해 언제나 딱 부러진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문은 대체적으로 성공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성공을 “기적”이라고 한다. 물음에 대한 효율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학문이 전문화되고 분과화될 수밖에 없는데, 학문의 성공은 다양한 분과학을 양산했다.

그런데 몇몇 물음에 대해서 학문은 그 어떤 대답도 낼 수 없었다. 학문은 “사람은 왜 사는가?”에 대해 답할 수 없었고 “세계는 영원히 존재하는가?”라든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도 답할 수 없었다. 한때 철학이 이러한 소위 ‘형이상학적’ 물음에 답하려 노력했지만 철학은 실패하였다. 철학이 이런 물음에 답을 내지 못하자 어떤 이들은 철학은 학문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철학자들은 이런 비판에 대응해 학문이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형이상학이나 신학이고, 철학이란 곧 이러한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리학이 학문의 꽃으로 자리잡고 있을 때, 그 학문성을 의심받고 있던 철학은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을 형이상학의 비판․부정․극복에서 찾았다. 형이상학 부정론자들은 만일 어떤 물음이 “진정한” 물음이라면 그것은 대답될 수 있고, 만일 대답될 수 없다면 그것은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역시 언표될 수 없”기 때문에 풀리지 않는 물음, 즉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물음이 좌우간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은 또한 대답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라!” 이것은 형이상학 부정을 표현한 가장 아름다운 경구이다.

그러나 삶의 바닥으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 경구가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한 슬픈 이야기: 사랑하는 아들이 뇌염모기에 물려 죽게 되어 세상에 홀로 남게된 어머니에게 의사는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의학적인 설명을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흐느끼면서 의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 왜 그 뇌염모기가 우리 아이를 물었죠?” 그러자 의사는 아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부인, 그건 무의미한 질문입니다.” 오, 의학이 얼마나 무기력한가! 그러나 부인의 물음은 결코 무의미한 질문이 아니다. 우리는 뇌염모기가 관념이나 말에 의해 “구성된 세계” 속에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런 뇌염모기를 결코 구성할 수 없다. 엄연히 실재하는 그 뇌염모기가 실제로 사람을 물어 죽게 한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면 그건 삶과 세상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뇌염모기뿐인가! 연간 5만 명의 어린이가 ‘굶어서’ 죽어가는 현실이나 아우슈비츠의 대학살, 또는 ‘사람의 땅’ 아래에 매설된 수십 억 개의 지뢰에 대한 그 어떠한 질문도 무의미할 수 없다.

물음을 금지하는 것은 사실상 폭력이다. 링 라드너Ring Lardner의 어떤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대화가 나온다. 

“아빠, 왜 우리는 거기에 다시 가는 거야?” 

“입 닥치고 있어” 하고 그의 아버지는 설명했다explained.

그러나 그건 설명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질문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다. 침묵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해명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물음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물음이다. 따라서 수수께끼가 정말로 있을 수 없다면, 우리 삶에 ‘중요한’ 물음은 언젠가 대답될 수 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묻는 질문이라면 그 질문은 유의미한 질문이다. “사람에겐 왜 고통이 있는가?”, “사람은 왜 죽는가?”라는 질문이 사람의 삶에 실로 중요하다면 그것은 대답되어야하고 대답될 수 있다. 학문은 이 물음에 앞에서 진지해야 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물음은 결코 무의미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형이상학 극복론자들의 처방에 만족할 수 없다. 그들의 전략에는 학문science이 삶의 문제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인문학을 물리적 학문, 즉 자연과학과 차별화하고, 자연과학과 기술과학이 삶의 문제의 주범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학문은 그것이 실증과학적인 모습을 지닐 때만 학문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결과적으로 인문학으로 하여금 자연과학화하도록 압력을 가하거나, 아니면 자연과학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도록 강요한 셈이 되었다. 인문과학적 문화와 자연과학적 문화 사이의 분열과 주도권 다툼이 문화의 전분야에 걸쳐 심화될 때, 급기야 사람의 삶 자체는 사분오열되고 말 것이다. 학문이 통합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학문은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형이상학 극복에서 철학의 정체성을 찾는 이들은 생생한 삶에 관심을 두고 삶의 이해에만 종사하려 하면서도, 자연과학을 삶의 문제와 무관한 것으로 파문시킴으로써 철학의 통합적 임무를 포기하고 만다. 형이상학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삶과 함께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는” 학문이다.



맺는말


단지 외양일 뿐인 경험적 자료 중에는 속성에 대해서 언급할 만한 결정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감각경험을 통해서는 속성에 대해 여러 해석들 중 어떤 하나를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양자물리학에 의해 이런 해석들 중 틀린 것을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양자물리학이 제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이런 문제들에 도전하는 학문으로서 양자메타물리학을 제안한다. 양자메타물리학은 ‘양자물리학 다음에 해야 할 학문’이다. 이것은 속성에 대한 옳은 해석을 결정하는 데 종사한다. 이제, 현상 이면에서 현상을 결정하는 사물의 속성에 대한 물음은 더 이상 무의미하지 않다.

형이상학metaphysics의 현대적인 기능은 모호한 개념을 해설하거나 그릇된 생각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만학의 여왕이었던 형이상학이 이처럼 고작 해설하고 치료하는 ‘활동’으로 축소된 것은 재래의 형이상학이 단순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철학 외부적 비난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은 학문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는 철학 내부의 비판 내지 부정의 결과이다. 철학 또한 과학으로 풀 수 없는 물음으로서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하여 그 물음이 무의미한 물음임을 깨우치는 일종의 활동으로 기능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물음 해소의 활동이 철학의 학문적 본질이라는 데 반대하고, 해답을 제공하는 데 종사하는 학문적인 형이상학을 제안하려 했다. 우리는 그것을 메타물리학meta-physics이라 불렀다. 특히 양자메타물리학은 물리학과 메타물리학 사이에 다리를 놓는 학문이다. 우리는 한때 무의미한 것이라고 비난받았던 질문에 대해 대답하려고 애쓴다.

양자물리학이 묻고 양자메타물리학이 도전하는 문제들은 바로 철학사에서 끊임없이 되묻는 문제들 중 일부이다. 문제의 공유는 필연적으로 논의의 공유를 가져온다. 따라서 우리가 제안하는 양자메타물리학은 철학자들의 메타물리학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철학의 영역에 진입하는 메타물리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양자메타물리학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자연화된naturalized 메타물리학이고, 학문적scientific 메타물리학이다. 그러나 여기서 개괄된 양자메타물리학의 초안은 학문적 메타물리학의 한갓 첫걸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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